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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비 Sep 25. 2020

검은 머리 송충이는 어떻게 되었나요?

죽음과 함께 하는 우리들의 자세

                                                                                                                                                                         찬란한 빛이 쏟아지는 한낮의 오후.

집 앞마당에 이름을 알 수 없는 꽃들이 피어있다.


그 빛을 따라 고운 꽃들이 그들의 언어로 대화를 한다.

"오늘도 따뜻한 광선 덕분에 내 몸에 있는 세포 하나하나가 사랑스러워지고 있어. 내 몸에는 장밋빛 꽃향기가 뿜어져 나오고 바람에 일렁이는 초록 잎사귀는 더 순진해지고 맑아지고 있어."

"우리의 모습이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을 온몸으로 느껴져"

"얘들아!  몸을 한껏 단장하자. 그러면 내 몸에는 신비한 꿀들이 샘솟고 귀여운 벌들이 찾아올 거야. 바람이 왔을 때는 몸을 마구 흔들어 향기로운 꽃향기를 퍼뜨리자.  저 멀리 매혹적인 나비가 찾아오도록.

노래도 부르자. 아, 우리는 소리를 낼 수가 없잖아. 좋은 생각이 있어. 괴롭지만 따끔거리는 검은 머리 송충이를 초대하자. 꿈틀거리며 반짝거리는 송충이를 찾아낸 박새가 우리를 대신해서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 줄거야!"


 "초대한 곳이 죽음의 자리였다는 걸 어리석은 송충이는 알 수가 없었네. 난 대신 맛 좋은 상차림에 감동했고 감동의 노래를 부른다네" 라며 노래를 부를 거야!

 


우리에게도 자연에게도 삶과 죽음은 항상 존재한다.

죽음의 자리에 초대를 받으면 피하지 말고 당당히 검은 머리 송충이처럼 속는 척하며 눈을 감자.

죽음에 의연해지기보다는 자연의 이치임을 알고 자연스럽게 맞이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건 아닐까?


어릴 때  옆집에 사는 친구 아버지가 돌아가신 적이 있다. 늘 웃으셨고 다정하셨던 분이었는데 순간 사라지셨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처음으로 느꼈고 일상의 삶이 한순간에 바뀔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막연한 두려움이 생겼다.


죽음은 두렵다. 무섭다. 나에게만은 절대로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불안함이 있다.

하지만 몇 년 전에 봤던 다큐에서 너무나 간절히 죽고 싶은 데 죽지 못해 괴롭게 살고 있는 어르신이 나왔다.

100살이 넘었고 이미 자신의 아들과 친구들이 죽음의 강을 건넜으며 홀로 살아가고 있었다. 고독과 슬픔 속에서 수없이 자살 시도도 해봤지만 소용없었다며  죽는 것이 소원이라고 울먹이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친구도 가족도 없는 데 장수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오래 살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사는 동안 행복하게 사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같다. 미래에 답보된 행복보다는 현재의 행복을 생각하게 되었다.


죽음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축복이라는 말도 있다.

그 말이 맞다면 죽음은 슬픈 일도 되지만 축제도 돼야 한다.

죽은 자를 위해서는 함께 슬퍼하기도 하며 노래를 부르며 홀로 가야 하는 그 길을 응원해줘야 한다.



애도 과정.

산 자를 위해서는 반드시 슬픔의 과정이 필요하다.

죽은 자를 위해 억지로 참아내는 것이 아니라 펑펑 울어서 쏟아내야 한다.

애도의 기간을 두고 충분히 충분히 슬퍼해야 한다.

내가 가장이어서, 내가 언니라서, 내가 부모여서, 내가 형이어서 참으면 안 된다.

참는 시간만큼 슬픔은 어느 순간 나의 일상을 파고든다.


많은 내담자가 죽음 앞에서 초연했다거나, 아무렇지 않게 빠른 시간에 일상을 복귀한다거나

그 슬픔을 지우기 위해 자신의 몸을 지치고 쓰러지도록 노동으로 잠식시킨다.


수많은 대안이 있어도 그 감정을 오롯이 느끼는 것만큼 나 자신에게 충실한 일은 없다.

검은머리 송충이는 어떻게 되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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