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늘 단편 - 걸어야 보이는 더 많은 것들
스페인의 알프 하라스 지역을 여행 하던 중 남루한 차림의 한 신사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이보슈. 천유로만 줘보시게."
나는 당황스러웠다.
"아니. 당신 대체,... 십 유로도 아니고,... 천유로는 나에게도 큰돈이란 말이오. 무슨 말 같지도 않은!!!"
그는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말을 이었다.
"난 당신을 도와주려는 것이오. 당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주겠소."
나는 그 신사를 짧은 시간이지만 면밀하고 자세하게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의 블레이저 재킷은 소매나 단추 부분이 조금 낡긴 했지만 잘 세탁되어 있었고 희미하게나마 다리미 자국도 보였다. 관리가 잘 되어있는 네이비 재킷이었다. 아마 2000년대 초반에 만들어진 랄프로렌의 재킷 같았다. 바지도 잔체크가 들어가 있는 회색 모직 바지였는데 전체적으로 짙은 갈색의 옥스퍼드 구두와 무척 잘 어울렸다. 서글서글하게 잘 웃는 인상이 누구에게 사기를 치거나 할만한 사람은 분명 아닌 것 같았다. 그래도, 천유로는 모르는 사람에게 덥석 주기에는 큰돈이었다. 내가 잠시 고민하는 듯 하자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정말이오. 당신은 지금 무엇을 원하오? 내게 말하시오! 내가 돈을 받는 순간 당신은 바로 그것을 얻게 될 것이오."
나는 대답했다.
"결혼이오!!! 나는 결혼이 하고 싶소!!! 지금 60살이 넘었는데 머리도 다 벗겨지고 군데군데 주름만 가득하오. 배도 나온 데다가 쳐졌소. 심지어 머리카락도 없는데 정수리에서 썩은 달걀 냄새까지 난다오."
나는 왠지 진심을 말했고 오늘 술값으로 탕진될 나의 돈 천유로는 어느새 그 신사의 손에 들려있었다. 그 신사는 나의 돈을 그의 작은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그리고는 그의 봉뿌앙 가방에서 큰 봉지를 꺼내 나에게 건네주고는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었다. 나는 귀신에 홀린 느낌으로 봉지는 열어보지도 않은 채 멍하니 걸어서 숙소로 돌아왔다. 나는 잠시 침대에 앉아 정신을 추스르고 찬장에서 야마자키 12년 산 한 병과 페트론 한 병, 그리고 1998년 빈티지 오퍼스원을 한 병 가지고 자리로 돌아와 차례로 한 잔씩 마신 뒤 그 큼지막한 봉투를 열었다. 그 봉투에는 하몽이 들어 있었다. 하몽은 스페인의 전통 음식 중 하나로 보통 이베리코산 돼지를 절여 만든 일종의 식품이다. 보통 좋은 하몽은 와인이나 술안주로 그냥 먹기도 하고, 바게트 같은 것에 얹어 먹기도 한다. 왕실에 들어간다는 5j급 하몽들도 요즘에는 무척 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에 고급 하몽을 사 먹을 수 있는 허들이 많이 낮아진 상태다. 나는 화가 났다. 천 유로가 고작 하몽이라나. 나는 숙소에 미리 사둔 야마자키를 샷으로 세 잔 연거푸 들이켰다.
'사람을 가지고 장난쳐도 유분수지. 가뜩이나 노총각인 것도 서러운데... '
급하게 숙소에 오느라 안주할 거리를 사 오지 않은 나는 눈앞에 보이는 하몽을 한 개 집어 입에 넣었다. 윗니와 아랫니가 부딪치고 혀가 압 안에서 한 바퀴 구르자 나는 하몽과 사랑에 빠졌다. 나는 클로젯에 잘 넣어둔 오퍼스원을 바로 오픈한 뒤 테이스팅도 하지 않고 병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고 다시 하몽을 한 개 먹었다. 이제 나는 주례 선생님이 필요했다. 지금까지 내 인생에 큰 비중을 차지했던 술도, 늘 하고 싶던 인간 여성과의 결혼도 이제는 무의미했다. 나는 오늘부로 하몽과 결혼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