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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 사용법

작업노트

by 에티텔 Mar 13. 2025
이효연, 언젠가의 작업실, 아사에 유채, 130.3x162cm, 2023이효연, 언젠가의 작업실, 아사에 유채, 130.3x162cm, 2023


  나에게 작업실은 무엇일까? 나의 흔적이 쌓이는 공간? 흔적은 시간이 지나간 자리에 남겨진 것이므로 작업실은 시간으로 직조된 공간일까? 일단 시간으로 쌓아 올린 공간이라는 데 동의하고 더 나아가 본다. 나는 시 공간을 표현하고 싶고 그것을 분해하고 싶고 다시 조립하고 싶다. 얼마전 뒤늦게 테드 창 원작의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진 <컨택트>를 보았다. 영화속에 ‘미래의 기억’이라는 개념이 나온다. 기억은 이미 쓰여진 것이고 동시에 어디에도 있을 수 있는 개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각각의 시간대에는 각자의 기억이 있을 수 있다. 과거의 기억, 미래의 기억, 현재의 기억, 이편의 기억, 저편의 기억. 시간은 선형적으로만 흐르는 것이 아니고 비선형일 수도, 하나가 아닐 수도 있다. 이런 카오스가 바로 나에게는 작업실이다.


  작업을 하다 보면 나는 지구 반대편을 둘러보기도 하고 마음속에 고요히 기억되는 숲길을 걷기도 한다. 자주 걷는다. 걸으면서 생각하므로 그것은 나에게 작업의 연장이다. 걷는 공간이 작업실로 확장될 수도 있다. 작업은 머릿속에 끊임없이 흐르는 생각을 붙잡아주고 캡쳐하고 구현하고 편집하는 일이므로 그 모든 과정 속에서 나는 작업실과 주변 공원 그리고 한강을 걷는다. 그 각각의 공간을 오가는 건 나이고 내가 작업하고 구상하며 시간을 보내는 곳이니 또한 작업실이다. 


이효연, Han river_Jeju, 캔버스에수채, 31.8x40.9cm, 2023이효연, Han river_Jeju, 캔버스에수채, 31.8x40.9cm, 2023


  한강을 그리고, 길을 그리고, 길이 없는 덤불숲을 그렸다. 모든 과정속에서 나는 무언가를 쌓는다. 쌓아 올리는 것은 내가 자주 하는 행동이고 좁은 공간을 활용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나는 자꾸만 쌓는다, 책을 쌓고 그림을 쌓고, 물건을 쌓는다. 작업실 가득 쌓은 물건들이 나를 보여준다. 그렇게 나는 구체적인 것 뿐만 아니라 시간을 쌓고 기억을 쌓고 마음을 쌓고 다시 그것들을 풀어 헤친다.


이효연, 작업실 창가, 아사에 돌가루와 유채, 72.7x181.8cm, 2023이효연, 작업실 창가, 아사에 돌가루와 유채, 72.7x181.8cm, 2023


  작업실이란 무엇일까 하는 물음에 대해 생각하다가 나를 멀리 돌아보게 되었다. 그럼 나는 작업실을 어떻게 그렸을까? 우선 관찰하기로 했다. 보이는 구석구석을 그리기도 하고 상상하는 공간을 그리기도 하였다. 그림 안에 나처럼 보이는 인물을 등장시키기도 하였고, 그 인물을 정물들 중 하나인 정물처럼 대하여 그리기도 하였다. 나는 무엇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것이 없다. 이것은 독일의 화가 게르하르트 리히터가 했던 말이기도 하다. 나 또한 그의 생각에 공감했고 그것은 시간이 흐른 뒤에 내 생각이 되었다. 나는 작업실 안에서 더 소중한 것도 덜 소중한 것도 없다.


  그림은 생각의 결과이다.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그린 그림들은 나의 생각의 흐름이면서 동시에 상상의 결과물이다. 하나하나 관찰하고 그린 것도 있고 생각한 것을 구현해낸 것도 있다. 어쨌거나 모든 것은 나를 통과한 시간과 공간이고 그것의 직조물이다. 그러므로 작업실은 나를 가장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는 현미경 같은 장치이다.



2023년 도로시 살롱에서 있었던 개인전 <작업실 사용법>을 위한 작업노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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