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분했는데, 나에게속은 건 나 자신이었다.
“민지야 학교 끝났어?”
“엄마.”
아이가 달려와 팔에 안겼다.
“엄마, 나 기다렸어? 회사 안 갔어?”
“안 갔어. 민지를 기다렸지.”
아이를 품에 안으니 빛 안에 감싸 인 듯 평안했다. 내가 이 느낌을 잃어버린 건 언제부터, 무엇 때문이었을까? 아이를 안고 있으니 온 세상도 다 안겨 왔다. 이대로 충분하게.
“민지야, 우리 놀러 갈까? 민지가 하고 싶은 거 하자.”
“진짜? 엄마랑 놀이터 가고 싶어”
“놀이터? 시시하게. 동물원 갈까?”
“사자 있어? 기린도 있어?”
“전에 갔었잖아. 민지가 좋아하는 사막여우 보러.”
“이젠 사자가 더 좋아. 젤 세잖아.”
아이의 엄마로 살아가는 일이 가장 기쁜 일이었는데, 나에게서 이 찬란한 일상을 뺏어 간 건 무엇일까.
“민지야, 미안해. 엄마가 잘 못 챙겨줘서.”
“엄마, 이제 친구 때문에 안 바빠?”
친구 때문에 안 바빠하고 묻는데 소름이 돋았다. 아이도 다 알고 있었다. 엄마가 아빠와 내가 아닌 다른 존재 때문에 바빴다는 것을.
모두를 속이고 있었던 게 아니라 나에게 속은 건 나 자신이었다.
“응, 이젠 엄마 안 바빠. 민지랑 같이 있을 거야.”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설마 또 그 남자?’
다행히 남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