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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짠 Mar 29. 2021

시간의 언어 9

충분했는데, 나에게속은 건 나 자신이었다.

“민지야 학교 끝났어?”

“엄마.”

아이가 달려와 팔에 안겼다.

“엄마, 나 기다렸어? 회사 안 갔어?”

“안 갔어. 민지를 기다렸지.”

아이를 품에 안으니 빛 안에 감싸 인 듯 평안했다. 내가 이 느낌을 잃어버린 건 언제부터, 무엇 때문이었을까? 아이를 안고 있으니 온 세상도 다 안겨 왔다. 이대로 충분하게. 


“민지야, 우리 놀러 갈까? 민지가 하고 싶은 거 하자.”

“진짜? 엄마랑 놀이터 가고 싶어”

“놀이터? 시시하게. 동물원 갈까?”

“사자 있어? 기린도 있어?”

“전에 갔었잖아. 민지가 좋아하는 사막여우 보러.”

“이젠 사자가 더 좋아. 젤 세잖아.”

아이의 엄마로 살아가는 일이 가장 기쁜 일이었는데, 나에게서 이 찬란한 일상을 뺏어 간 건 무엇일까.

“민지야, 미안해. 엄마가 잘 못 챙겨줘서.”

“엄마, 이제 친구 때문에 안 바빠?”

친구 때문에 안 바빠하고 묻는데 소름이 돋았다. 아이도 다 알고 있었다. 엄마가 아빠와 내가 아닌 다른 존재 때문에 바빴다는 것을. 

모두를 속이고 있었던 게 아니라 나에게 속은 건 나 자신이었다.


“응, 이젠 엄마 안 바빠. 민지랑 같이 있을 거야.”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설마 또 그 남자?’ 

다행히 남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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