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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엘 May 15. 2024

이런 계절엔 걸어야 합니다.

서울 둘레길을 걷습니다.

이 계절은 아름다운 계절입니다. 그래서 도서관에 도저히 갈 수가 없습니다. 네, 맞습니다. 도서관에 가지 않은 핑계입니다. 그래서 걸었습니다. 서울 둘레길.


도서관 통창으로 따스한 햇살이 내려오고 파란 하늘엔 옅은 구름들이 지나갑니다. 바람이 살랑 불어오고, 꽃들마저 살랑 떨어지는 이 계절엔 도서관에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 집에서 함께 놀고 있는 남편이 육아 휴직동안 TO DO LIST '서울 둘레길' 걷기를 시작했습니다. 2년 전, 엄마도 한 달 동안 걸어 완주한 그 길입니다. 그래서인지, 엄마는 무조건 함께 걸으라고 강하게 추천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도 한번?" " 나도 같이"라고 생각하며 따라나섰습니다.


데이트인 줄 알고 따라 나섰는데, 이건 극기훈련이었습니다.

하루에 평균 2코스를 걷습니다. 오전에 첫 번째 코스를 걷고 오후엔 두 번째 코스를 걷습니다. 총 156.5 km의 길이 8코스로 되어 있습니다. 하루 평균 6시간, 약 18km, 약 2만 5천보~3만보를 걷게 됩니다. 저는 올해 21개 코스로 개편된 길이 아닌, 기존 8코스로 걸었습니다.


오르막길을 오를 땐 가슴이 터질 것 같고, 내리막길에선 종아리의 근육들이 터질 것 같습니다. 오후 마지막 코스에서는 다리가 후들후들 합니다. 이런 하루를 보내고 잠을 잔 첫날엔, 꿈에서 내 종아리로 벌레들이 붙어 올라오는 그런 이상한 악몽도 꾸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다음날 일어나면 또 그 서울 둘레길을 걷고 싶습니다. 그렇게 매주 목요일 둘레길을 걸었습니다.


온몸으로 느끼는 계절

이렇게 평화롭게 평일 낮에 오롯이 이 계절을 온몸으로 느끼고 그 자연 속에서 숨 쉬었던 적이 또 언제 있었을까요? 벚꽃이 만발한 4월 초 시작한 서울 둘레길은 넘치는 색과 봄의 생동감으로 매주 그 모습이 다릅니다. 분홍색 벚꽃 비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길을 걸었는데, 이젠 아카시아 꽃 눈이 하늘에서 떨어져 등산로를 가득 덮고 있습니다. 노란색 황매화, 핑크빛 철쭉으로 가득한 등산로는 정말 아름답습니다. 요즘엔 보라색, 노란색 분꽃들이 가득하네요.


물소리, 새소리가 끊임없고, 다람쥐와 청설모, 거미줄에 매달려있는 작은 애벌레들의 움직임을 함께 합니다.나뭇잎들의 연한 연두색이 점점 진해지고, 소나무에 가득 달린 송홧가루가 바람이 불 때마다 쏟아져 내립니다. 매주 다른 색으로 바뀌는 다채로운 컬러를 볼 수 있는 행복이 가득합니다. 다음 주의 또 다른 꽃을 기다리는 설렘도 있습니다.


내 발로 직접 꾹꾹 눌러보는 우리나라 서울

흡사,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만들었을 때가 이런 느낌이었을까 싶습니다. 서울의 곳곳을 걸어서 내 발로 직접 발자국을 꾹꾹 남깁니다. 발로 새겨보는 서울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우리나라가 정말 아름다운 나리임을 다시 알게 됩니다. 서울의 문화, 자연, 생태를 모두 만나 볼 수 있는 길입니다. 물길을 따라가다 보면, 미술관 도서관이 함께 보입니다. 광진교로 한강을 걸어서 건너봅니다. 평창 마을길을 걸을 땐, 그 좋다는 평창동 주택들의 담과 앞마당을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그늘 하나, 쉴 의자 하나 없는 평창동 언덕을 직접 걸어 오르내리는 어려움은 있습니다. 그러다, 그 길에서 운 좋게 인스타그램에서 핫플로 유명한 더피아노 카페를 만납니다. 그리고 카페인 수혈을 하고 카페의 멋진 뷰를 감상하고 또 걷습니다.


북한산은 정말 멋있습니다. 계곡이 흐르고, 멋진 기암괴석이 보이는 그 길을 따라가고, 소나무가 무성한 능선을 따라가다 보면 와, 멋지다.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나옵니다. 서울에 지금까지 살면서 한번 가본 적 없는 동네, 산 등 모든 곳을 발로 걸어갑니다. 익숙한 줄 알았던 서울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호흡이 가쁠수록 더 고요해집니다.

물론 둘레길은 절대 나를 정상으로 보내지 않습니다. 산의 둘레를 걸어야 하니까요. 정상표시와 반대로 내려가는 서울 둘레길의 오렌지 사인을 보는 것도 큰 즐거움입니다. 하지만, 때론 산길을 올라가고 오랜 시간 산을 걸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기나긴 한강길을 걷고, 천의 산책길을 걷습니다. 나의 호흡이 가쁠수록, 몸이 힘들수록 주변은 더 고요해집니다. 심장은 시끄럽게 쿵쾅 거리는데, 산속은 고요합니다. 그래서 나에게 더 집중을 하게 됩니다. 나에게 집중하고 바람이 상쾌하게 불며 잡생각이 사라집니다. 걷기 명상 효과가 나타나는 순간입니다. 이런 게 행복이지. 다른 게 뭐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해냈다는 만족감. 끝냈다는 성취감.

회사에서는 늘 프로젝트를 끝내고, 보고를 끝내고 성취감과 끝냈다는 만족감에 맥주 한잔을 하곤 했습니다. 퇴사 후, 쉬는 나는 프로젝트나 성과가 없습니다. 아마도 허전했나 봅니다. 그래서, 도서관도 3개월 매일 출근하자며 지금 글쓰기 프로젝트를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서울둘레길도, 또 다른 프로젝트가 되었습니다. 157km를 걷는 목표를 정하고 해낸 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주황색 리본을 곳곳에서 찾으면서 힌트를 얻는 것 같습니다. 그 주황색 리본과 화살표는 가야 할 방향을 알려주는 것뿐만 아니라 잘 가고 있다는 응원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루 코스를 완주하니, 프로젝트를 하나 잘 끝낸 만족감과 성취감이 가득합니다. 전체 코스를 완주한 나는 무서울 것이 없고, 그 종이 하나에 찍혀있는 코스별 도장들이 어떤 인센티브보다 멋져 보입니다. 서울 둘레길을 걷고 나서 남편과 등산을 끝내고 마시는 막걸리 한잔 아니, 한 병은 정말 끝내줍니다. 그래서 제가 여전히 몸무게가 그대로 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걸어도 말입니다.


아니죠. 원영적 사고로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둘레길을 걸으니까, 건강해지고 막걸리를 먹어도 살이 더 안 찌잖아, 럭키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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