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단 횡단이 마려울 때는?
남이 안 볼 때와 타인과 함께 건널 때이다.
무단으로 길을 건너다가 경찰관에게 걸리면 “왜 나만 단속하나”라면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광경을 볼 수 있다.
과거부터 한국은 강제적 규정보다 남의 눈을 의식하는 방식으로 서로 감시했다.
반면 통치자는 관행을 앞세워 아무렇지도 않게 법과 윤리를 위반했다.
그래서 서양과 달리 국내 지도층이 존경받지 못하는 것이다.
도덕은 사회적 약속이므로 지켜야 하지만, 그렇다고 도덕에 갇혀 누군가의 시선을 너무 의식하지 말자.
이제 세상은 정교한 방법으로 통제하기 시작했다.
미셸 푸코는 이런 현대 사회를 중앙 감시탑 구조인 ‘판옵티콘’으로 설명했다.
지배자는 감시탑에서 피지배자를 망볼 수 있고, 피지배자는 창으로 가려진 공간에서 꾸민 그들의 존재를 알지 못해 스스로 검열하는 원리이다.
마크 맨슨은 유튜브에 「가장 우울한 나라를 여행하다」라는 영상을 올렸다.
한국은 생동감이 넘치지만, 불안과 우울, 알코올 중독과 자살률이 높다.
우리가 우울한 나라가 된 이유는 나쁜 쪽으로 발달시켰기 때문이다.
자기 삶의 자율을 잃어버리고, 강자만 살아남는 구조를 만들었다.
지나친 비교와 경쟁이 판치는 한반도에서 선량한 민중은 창살 없는 감옥처럼 타인 눈초리와 자기검열에 지배당했다.
광장에는 누구나 딸 수 있는 과실나무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기득권은 바닥에 두 줄을 그었다.
앞으로 줄지어서 그 안으로만 달려야 한다고 홍보했다.
그들은 경계선을 벗어나려는 인간은 사회 부적응자라면서 줄을 그어 망신과 처벌, 협박과 왕따를 시켰다.
경계를 설정한 자가 범인이다.
그들은 심판을 겸한 선수로, 맨 앞줄에서 출발하고, 자식들이 새치기할 수 있도록 경기규칙을 바꾸었다.
당신이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들이 정한 노선으로만 달린다면 딸 수 있는 과일은 거의 없다.
‘회사는 전쟁터이고 바깥은 정글’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제법 있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면서 어디서 주워들은 얘기로 어떤 일이 펼쳐질 줄 모르는 세계를 멋대로 재단한다.
이것은 자기도 가지 않으면서 다른 이도 넘지 못하게 철조망을 치는 격이다.
직장을 벗어난 세계는 징글징글할 정도로 낙원일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용기 있는 자만이 정글을 누비며, 다양한 열대 과일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은 마라톤이 아니다〉라는 일본의 광고를 본 일이 있다.
이 CF에서 주자들은 한쪽으로 흐르는 시간에 따라 서로 경쟁했다.
그러다가 한 선수가 레이스를 이탈하고 자기가 원하는 길로 뛰기 시작하자, 나머지도 각자의 길을 찾아 흩어졌다.
새로운 출발점을 남이 가지 않는 길에서 시작하라.
인생은 코스와 종착점이 정해졌다는 편견을 극복하고, 고민하고 또 고민하면서 세상의 끝까지 달려가 보라.
남들이 뒤처지지 말라고 외치면.
“차라리 먼저가! 난 생각하고 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