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는 순간, 머무는 마음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아뿔싸, 늦잠을 잤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시계를 보니, 어느새 아침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어젯밤 책을 읽다가 시간 가는 줄도 몰랐던 탓이었다. 오늘은 유니님과 함께 아침을 준비하려 했는데, 결국 계획이 어긋나고 말았다.
서둘러 1층으로 내려가니 부엌에서 두런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니님은 우엉을 손질하며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싱크대 위에는 당근, 어묵, 맛살을 비롯한 다양한 김밥 재료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나는 미안한 마음에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무엇을 하면 될까요?”
유니님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오늘 아침은 간단히 먹고 트래킹 갈 거니까, 샐러드 좀 준비해 줄래요?”
나는 얼른 루꼴라와 상추, 사과를 꺼내 씻으며 서둘러 샐러드를 만들었다. 아이는 커피를 내리면서, 샐러드에 넣을 치즈를 잘라 주었다. 반숙으로 삶아 놓은 달걀까지 곁들이니 금방 풍성한 샐러드가 완성되었다.
한쪽에서는 유니님이 김밥 속 재료를 준비하고 있었다. 유니님의 김밥은 평범하지 않다. 궁채나물을 넣어 오도독 씹히는 식감이 독특했고, 밥보다 우엉, 당근, 맛살 그 외 재료를 푸짐하게 넣어 한 줄만 먹어도 배가 불렀다.
오늘 김밥은 저녁에 밴쿠버로 떠나는 아이를 위한 것이었다. 그곳에서 만날 친구와 함께 먹으라고 넉넉히 준비하는 듯했다.
샐러드로 간단히 아침을 먹고 가까운 트레일이라도 걸어보자는 유니님의 제안에 따라 우리는 체독 트레일(Chedoke Radial Trail)을 걷기로 했다. 날이 풀려서인지 공원은 활기로 가득했다. 주차장에는 차들이 여러 대 서 있었고, 단체로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도 보였다.
우리는 천천히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따스한 봄볕이 마른 나뭇가지 사이로 스며들었고, 공기는 상쾌했다. 걷다 보니 작은 폭포가 나타났다. 흐르는 물줄기가 아담하고도 예뻤다.
유니님이 말했다. “이 물이 흘러가서 결국 고속도로 옆의 큰 폭포로 이어지는 거예요.” 나는 작은 물줄기를 바라보았다. 멀리서 보면 웅장한 폭포도 이렇게 작은 시작점이 있겠지. 사람의 삶도 어쩌면 그렇지 않을까. 사소한 변화가 쌓여 결국 하나의 흐름을 이루고, 그 흐름이 큰 변화를 만든다.
높은 곳에서 바라본 해밀턴 다운타운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 산책로가 높은 곳에 있다는 것이 실감 났다. 산책로를 따라 한참 걷다 보니 철제 계단이 나타났다. 오르는 동안 땀이 배어났다. 오랜만에 땀을 흘리니 기분이 개운했다.
코스를 끝까지 걷고 차를 주차해 놓은 곳으로 돌아오는 길, 캐나다 특유의 멋스러운 저택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이번 겨울처럼 폭설이 내렸을 때 눈 치우기가 힘들었겠다고 말하며 웃었다. 산책 나온 사람들이 많았고, 마주칠 때마다 가볍게 인사를 나누며 차가 있는 곳까지 걸어갔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셋이 함께 차를 세차했다. 차에 묻은 먼지를 씻어내면서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이어 점심을 준비했다. 테라스에 있는 그릴을 닦고 그 위에 고기와 병어를 올렸다. 지글지글 익어가는 냄새가 코를 자극하며, 오랜만에 집에서 제대로 된 식사를 하는 기분이 들었다.
점심을 먹고 난 뒤, 우리는 다시 김밥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5시에 공항으로 출발할 예정이었다.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유니님이 김밥을 가지런히 챙겨 아이에게 건넸다. 아이는 맛있게 먹겠다며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친구랑 같이 맛있게 나눠 먹을게요.“
시간이 되자 우리는 공항으로 향했다. 키치너까지 차로 한 시간이 걸렸다. 국도로 이어진 길은 한산했다. 운전하던 유니님이 음악을 주문했다. 아이가 신나는 음악을 틀어 차 안의 조용한 분위기를 깼다. 창밖으로는 끝없이 펼쳐진 캐나다의 농장이 보였다. 그동안 보지 못한 색다른 풍경이었다.
나는 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조심하고 즐겁게 지내고 돌아오렴." "네, 잘 다녀올게요. 두 분도 좋은 시간 보내세요." 아무리 짧은 기간이라 해도, 떠나는 건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다. 무거운 가방을 멘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니 마음 한쪽이 허전해졌다.
아이를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세 명이 타고 있던 차에는 이제 유니님과 나만 남았다. 둘이 나누지 못한 이야기들을 나누는 사이 집에 도착했다. 이상하게도 길이 짧게 느껴졌다. 이야기 때문이었을까?
떠나는 사람이 있으면, 머무는 사람도 있다. 그렇게 우리는 또 하루를 보냈다. 떠나고, 머무르고, 다시 만나고. 그 사이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