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가 비리다면 양주를 먹어야 할 때가 된 것

퇴사 시점을 정했다는 것에 대한 고찰

by 제이

퇴사하기 한 달 전쯤 2주 동안 100% 전면 재택근무를 시행하였고, 재택근무를 집계하는 업무 때문에 사업회사의 담당자들과 매일 연락을 해야만 했다. 그러다 보니 그들과 약간의 전우애 같은 게 쌓였던 것 같다.


그 2주가 끝나고 많이 친해진 차장님께 말을 꺼냈다.


“차장님, 저 곧 퇴사해요”

“헐………… 뭐라고?? 재택근무 끝나면 점심이나 한번 하자고 하려고 했더니만……… 어디 좋은데 가요?”

“아………다른 회사 가는 건 아니고요, 이제 제 일을 해보려고요.”


“오………그래도 되는 나이다. 부럽다.
소주가 비리면 양주를 먹어야 할 때가 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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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은 애주가이신 차장님의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 말은 소주의 비릿한 알코올향을 떠오르게 하면서 나에게서 와서 꽂혔다.




어쩌면 퇴사를 선택하게 된 이유도 내가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조금은 극단적이지만 하나의 수단인지도 모르겠다. 지금 이 조직에 속해 있는 나의 상태가 내 기량을 펼치지 못하고 어딘지 모르게 답답하고, 불만족스럽다면 그건 다른 선택지를 생각해 봐야 하는 시기가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의 상태에서는 지금의 나의 선택이 잘한 선택인지, 잘 못한 선택인지 알 수 없다.

그리고 퇴사를 선택하게 된 이유도 굉장히 복합적으로 얽혀있기 때문에 그것을 낯낯이 파헤친다 한들 지금의 상황에서는 명확하게 하나로 규정되기 어려울 것이다. 시간이 지나야 만 비로소 알게 될 것 같다. 그리고 그 선택이 잘 한 선택인지 잘못된 선택인지 결정할 수 있는 것 자체가 지금의 나에게 달렸다.


지금 내게 주어진 게 소주라면 비리지만 소주를 참으면서 마실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역량을 펼칠 수 있는 능력치가 100인데 비린 소주를 마시면서 100의 기량을 펼칠 수 있을까? 아니, 비린 소주는 일단 나에게 만족감과 성취감을 안겨주지 못한다. 나는 회사 생활 3년 동안 점점 더 자존감이 낮아지는 것을 경험했다. 물론 OO회사 인사팀 팀원이 아닌 자연인 나로서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서는 또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그 길을 택한 것이다.


사람들이 물었다.


“힘들어서 나가나 보네.”

그런 말을 들으면 나는 황급히 변명을 하는 것처럼 대답했다.


“저 힘들어서 나가는 거 아니에요. 이제 제 길을 가려고요.”


내가 그렇게 말했던 이유는 내가 퇴사함으로써 더 힘들어질 우리 팀원들에게 뭔가 나 혼자 도망가는 것처럼 비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힘들지 않았다면 지금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현재의 내가 내린 결론은 이제는 양주를 마실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 3년이 힘들었건 힘들지 않았건 중요한 건 지금 이 시점을 인생의 전환점으로 잡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미래의 내가 후회하거나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말하지 못하게 행동으로 옮겨야 할 때라는 것이다.


지금 저기 더 비싼 양주가 있는데 비릿한 소주 맛에 길들여져 손을 뻗어보지 않는 건

미래의 내가 현재의 나에게 실망할 수 있으니,

저 멀리 뻗어본다.


양주가 잡힐지 잡히지 않을지,

미래의 나를 한 번 기대를 걸어봐야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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