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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영 Jun 27. 2020

봄은 너무 높은 곳에 있구나

정호승 <백송을 바라보며>

    겨울은 봄을 준비하기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

    겨울을 살기 위하여 있다



    정호승, <백송을 바라보며>, <<당신을 찾아서>>, 창비, 2020.



    이미 지나간 것들을 되돌아보지 말 것, 앞으로 살아갈 궁리를 할 것, 이 말들은 대체 언제까지 나를 고독하게 만들 건가. 심리 에세이들을 뒤적거리고, 제목이 좀 위로가 되어준다 싶으면 바로 집어 들고. 집에 들어와서 펼쳐들면, 다 똑같은 이야기들. 일반인이 경험에 비추어 썼든, 심리 전문가가 전문지식에 기초해 썼든, 결국엔 다 똑같은 이야기뿐이다.

    ‘혹시 몰라, 끝에는 내가 원하는 말이 있을지도.’ 인고의 시간을 갖고 꾸역꾸역 심리 책을 읽어가던 지난 나, 지금은 중간에 덮어버리기 일쑤. 방 안에는 심리 에세이만으로 ‘책기둥’ 하나가 세워진다. (재기발랄 문보영 시인도 집에 심리 에세이 좀 쌓아보셨을지?)


    나라면 ‘책이 탑을 이뤘다’고 할 텐데, 책기둥이라. 정말 책이 쌓인 모습이 똑 들어맞는다. 높아질수록 좁아지는 첨탑은 오로지 상공을 꿈꾼다. 유아독존의 상징. 반면 쌓여도 쌓여도 편평한 기둥은 건물을 받치기 위해 존재한다. 쓸모를 위한 높이!

    그런데 저 책기둥은 대체 뭘 떠받치려고 내 방 한 칸을 차지하고 앉아있는 건가? 지식? 교양? 때려 치자, 공부 지식 공부 교양 아주 지겨운 소리다. 아니면 감성?

    감성이라고 한다면, 저 책기둥이 떠받드는 그것이란 ‘앞으로 나아갈 용기’ 따위겠다. 책기둥은 내 앞날의 ‘봄’을 떠받들고 있다. 그러나 난 책기둥 아래서 현재의 ‘겨울’을 자각할 뿐이다.


    “지독한 불변의 과거에 머물러 있을 텐가, 뭔지 몰라도 뭔가 새로울 미래를 향할 것인가?”라고 누가 묻는 걸 상상할 때마다, 난 언제나 과거를 택하게 된다. 미래는 과거의 연속체이다. 내가 꿈꾸는 미래는 물론 아름답고, 평화롭다. 그러나 어떻게? 더 구체적으로 꿈꾸려 노력할수록, 아름답고 평화로운 장면은 없다. 뭔가, 일단, 나 혼자 있다. 주변은 아무것도 없이 하얗다.


    화이트-아웃(White-out).


    눈밭 위에 내가 있다. 나밖에 없으므로 나는 없기도 하다. 나는 따라서 설원 위에 어떠한 실체를 찾아 두어야겠다.

    미래에는 실체가 없다. 내가 지나온 과거는, 혹여 왜곡되었더라도, 실체가 있다. 나는 과거를 향해 걸어가며 눈 위에 발자국을 남긴다. 발자국은 문장이 된다.

    편집된 과거로 가고, 과거를 나는 또 편집한다. 그러면 놀이터가 생긴다. 놀이터에는 나만 있지만, 나에게는 놀이터가 있다. 나에게 과거는 불변의 존재가 아니다. 가변의 존재이며, 실체가 있으므로 가변한다. 미래는 허상이며, 실체가 없으므로 변할 것도 없다.

    그네에 앉아, 발을 구르며, 나는 과거를 곱씹는다. 더 이전의 과거를 찾아서. 다시, 화이트,아웃. 책기둥이 눈보라 속에서 슬그머니 나타난다. 나는 그것을 이정표 삼아 대과거로 간다. (2020.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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