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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별 Mar 19. 2021

세 번째 대위기

깨질대로 깨진 로망, 엔딩만 기다리다.

이때쯤 되면 로망이라는 게 있었나, 그게 뭐였나 싶은 생각이 든다. 여기까지 온 걸 보니 정말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다. 역대 세 번째, 최악의 강도로 찾아왔던 대망의 마지막 대위기다.


애초에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이긴 했다. 이 시기가 유독 일적으로도, 사적으로도 바빴으니까. 일정이 바쁘면 잠이 모자라고, 피곤해지고, 모든 일에 한층 더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건 다시 생각해도 단순히 내가 예민한 문제는 아니었던 것 같다.




일이 끊임없이 밀려들었다. 25화에서 언급한 신간 맞이 도장 행사를 준비할 시점이라 도장판을 준비해야 했고, 이 말은 컬리 프린터가 없는 도서관을 떠나 두꺼운 종이에 한참 인쇄를 해와서 자르고 접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게다가 외부 행사 참여를 위해 어지간하면 피하려던 관리자와의 만남도 예정되어 있었다. 하필 쉬는 날은 또 왜 그리 많았는지. 쉬는 건 당연히 좋지만, 이렇게 바쁠 때 쉬면 일이 몰리고 힘들어진다.


아무튼 그런 때였다. 컨디션이 안 좋아 아침부터 일을 시작하지 못하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4학년 4반에서 1교시 도서관 수업 예약을 한 것이다. 알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때부터 벌써 오늘 하루가 쉽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1교시 시작까지 15분 정도 남은 시점이었다. 또 다른 전화가 왔다. 이번에 1학년이었다. 1교시에 두 반, 2교시에 두 반을 데리고 도서관 수업을 하겠단다. 이때부터 이미 뚜껑은 열리고 있었다. 그래도 꾹 참고 차분히 말을 이어나갔다.


"전에 메신저로 안내드린 것처럼 도서관에 자리가 많지 않아서 두 반이 함께 이용하는 건 어려워요. 그리고 1교시는 벌써 예약이 되어있습니다."


그 말을 하면서, 그래도 말이 통하는 상대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바보 같게도. 평소에 도서관에 꽤 왔었고 비상식적인 행동을 하지 않던 교사였으니까. 상대는 당황한 듯 다른 담임교사들과 다시 얘기해보겠다며 끊었다. 머리가 아팠지만 더 늦어지기 전에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전화를 통해 1학년 부장 교사가 꼭 해야 된다고 했다는 의사를 전달받았다. 1교시에 한 반, 2교시에 두 반, 3교시에 한 반을 데려오겠단다. 애초에 답은 정해져 있었던 거다. 정색을 해도 먹히지 않아 그냥 그러라고 했다.


원래 같으면 끝까지 싸웠겠지만, 물러섰던 이유가 하나 있었다. 바로 그 날이 도서도우미 학부모가 오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1학년 자녀를 둔 어머님이셨다. 어디 강제 참관수업 잘해보라는 의미로 알겠다고 했던 것이다. 그렇게 최악의 하루가 시작됐다.




1교시, 먼저 4학년과 1학년이 한 반씩 왔다. 그 와중에 1학년 부장 교사가 들어와서는 "자리 많네~" 라며 사람 속을 긁었다. 그거야 학생들이 소파에 끼여 앉아있으니까 그런 거 아니냐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지만 그냥 무시했다. 내 표정이 역대급으로 좋지 않자 그제야 두 반 담임 모두 눈치를 보며 학생들을 조용하게 유지했다.


애초에 오전에 행정 업무를 할 생각을 버린 나는 계속 돌아다니며 책수레에 쌓인 책을 꽂았다. 이렇게 해도 오전 내내 쌓일 것이 분명했으니까. 그러던 중 도서 도우미분이 오셨다. 그땐 정말이지 한 분이라도 오셔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함께 대출, 반납을 하며 1교시가 끝났고, 쉬는 시간에도 학생들은 몰려들었다.


2교시가 시작됐다. 1학년 두 반이 함께 등장했다. 데스크에 앉아 계신 학부모를 보더니 약간 당황하는 듯했다. 그걸 봐도 별로 통쾌하진 않았다. 그냥 계속 힘들기만 했다. 여전히 나는 책을 꽂기에 바빴다. 잠깐 수업을 하는 것 같더니 곧 자유롭게 책을 읽도록 하는 것 같았다.


첫 번째 위기의 악몽이 되살아났다. 학생들의 뜀박질이나 위험한 행동을 제지하고, 쌓이는 책을 꽂고, 거기서 일하는 사람은 나 하나밖에 없었다. 심지어 책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그런데도 교사는 그걸 빤히 보고도 줍지도 않고 혼내지도 않았다. 아까 처음에 전화를 했던, 분명히 말이 통한다고 생각했던 그 교사였다.


그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은 역시 너도 교사였구나, 였다. 애초에 교사에게 기대를 가지는 멍청한 짓을 해선 안 됐는데.. 턱끝까지 차오르는 욕을 꾹 누르며 천천히 주저앉아 책을 주웠다. 그냥 빨리 수업이 끝나고 다 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책이 쌓이는 걸 무시하고 데스크에만 앉아 있는 학부모도 마찬가지였다.


아까 쉬는 시간과 같은 상황이 반복되었고, 3교시는 그나마 한 반이라 조금, 아주 조금 나았다. 3교시에도 계속 책을 꽂았다.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최대한 많이 꽂아야 했으니까. 하지만 그런 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책수레 전체를 꽉 채울 만큼의 분량이 여전히 남았다. 점심시간이 지나자 당연하게도 더 많은 책이 서가에서 빠져나왔다.




이날은 정말 2시까지 다섯 시간 내내 책을 꽂았다. 쌓여 있는 업무는 하나도 못한 채로. 그렇게 하루 종일 책을 들고 돌아다녔는데도 허리나 팔, 다리보다는 여전히 머리가 더 아팠다. 아마 스트레스가 이유였던 것 같다. 결국 그날 저녁 병원에 갔다 오면서 가장 큰 회의감을 느꼈다.


그냥, 빨리 모든 게 끝났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마지막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기본적인 예의조차 없는 사람들로부터 하루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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