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갱년기와 딸의 사춘기가 겹치다
결혼 5년 차. 인공수정 2차 만에 아이가 우리에게 왔다. 어떤 자식인들 안 그렇겠냐마는 나의 딸도 오래 기다린 만큼 귀하고 소중한 아이였다. 아이를 낳고도 한동안은 내 품의 아이가 현실인가 싶은 의심이 들곤 했다. 혹시 애를 못 나서 미친 건 아닐까? 남들 눈에는 어떤 이상한 여자가 인형 하나를 마치 아기 다루듯이 들고 다니는 미친 짓으로 보이는 건 아니겠지 싶은 생각까지 들었으니까. 하루는 남편에게 매우 진지한 태도로 그런 얘기를 했더니 그는 웃기만 했다. (이 반응 뭐지?)
서른 후반대의 엄마가 애를 낳고 키우는 건 체력전에서 이미 패자나 다름없었다. 운동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던 엄마는 24개월까진 어떻게든 버틴다. 버틸 수밖에 없다. 가끔씩 소고기나 장어와 같은 고단백 식품으로 체력을 보강해줘 가며 말 그대로 '근근이'의 삶을 살았다. 이토록 체력이 저질인 엄마는 왜 아이를 36개월 넘어서 기관에 보내겠다는 마음을 먹었던 걸까? 6월생인 아이가 36개월이면 기관에 들어가기도 매우 어중간한 시기다. 게다가 D신도시에서 어린이집이란 의지와 돈만 있다고 가는 곳이 아니었다. 일단 기약 없는 대기란 문을 거쳐야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이미 버스타 떠난 뒤였다. 아파트 안에 있는 어린이집은 2학기에도 들어갈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단다. 체력의 한계 앞에서 이미 무너진 엄마는 눈앞이 깜깜했다. 어린이집이든 유치원이든 다섯 살에나 보낼 수 있을 터였다. 이렇게 정보력까지 떨어져서야 앞으로 애를 어떻게 키운담? 조부모 재력은 진즉에 포기했으니 이 신도시에 버틸 수 있는 건 오직 신앙뿐이던가?
지난한 육아의 세계가 언제 끝날지 계산해 보다가 섬뜩해지는 순간을 맞았다. 아이의 사춘기와 나의 갱년기 시기가 맞아떨어질 확률이 99.9.%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다. 내 나이 60에 아이가 대학에 들어간다는 사실보다 더 심각한 문제였다. 둘 중 하나는 조용히 지나가지 않는 한 역대급 폭풍이 몰아칠 수도 있겠구나. 몹시 심란해하는 엄마에게 누군가 그랬다.
“갱년기가 사춘기를 이긴대”
이 말을 위로로 받아야 할지 경고로 받아야 할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 없었고 그저 둘 중 하나만이라도 좀 조용히 지나가길 간절히 기도할 뿐이었다.
시간은 흘렀고 그때가 드디어 왔다. 6학년이 된 아이, 오십을 코앞에 둔 엄마. 서로에게 사적인 감정이 있는 것도 아닌데 호르몬은 우리 둘을 미친 듯이 흔들어댔다. ‘그래 맞아. 이건 호르몬 문제인 거야’라고 마음을 다잡아 보지만 눈앞에 보이는 딸의 언행은 매번 스트라이크로 날아왔고 화가 상시 장전된 엄마의 감정 방망이는 테크닉 따위 필요 없이 온갖 감정을 담아 휘둘렀다. 그렇다고 홈런이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엄마와 딸의 게임은 늘 파울에 그치는 게임이다. 승부 없이 지쳐가는 경기랄까? 그나마 다행인 건 갱년기가 시작되기 전에 공황장애가 먼저 찾아와서(지금 생각해 보면 공황장애도 갱년기의 한 증상이 아니었을까 싶다) 약을 먹고 있다는 사실? 이것도 '전화위복'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업! 업! 업!' 하는 마음을 약으로 '워~워~워' 해가며 아이의 사춘기를 한 발짝 물러서서 바라봐야 했다.
얼마 전 가게 앞에서 어느 모녀가 크게 싸우는 걸 봤다. 괴성과 고성이 오가는 몸싸움 현장이었는데 누구 하나 말릴 틈이 없었다. 결국 경찰이 출동했고 엄마와 딸은 강제적 거리 두기를 했다. 중고생쯤으로 보이는 딸과 엄마 같았다. 남일 같지 않은 이 기분. 나라고 일어나지 말란 법이 없는 장면. 그날 잠자려고 자리에 누운 딸에게 낮에 본 광경을 얘기해 주니 한참을 듣다가 하는 말.
“그런데 엄마랑 나는 요즘 크게 싸운 적이 없는 것 같아. 엄마도 소리 안 지르고”
“네가 생각해도 그렇지? 그런데 그게 왜 그런 것 같아?”
“모르겠는데”
“엄마가 지금 많이 참고 있는 중이거든. 그건 네가 좀 알아줬으면 좋겠다”
그랬더니 딸이 하는 말이 더 가관이다.
“그럼 앞으로도 계속 컴다운을 부탁해 엄마”
사춘기 딸다운 대답이다. 고맙다는 말은 어디 국 끓여 먹었니? 어떻게 하면 미운 말을 골라할까 연구라도 하듯 입만 열면 열에 아홉은 내 속을 뒤집는 말이다.
얼마 전 고하연 작가님의 '아이의 말선물' 북토크를 다녀왔다.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아이의 순수하고도 귀여운 말들을 10년 동안 기록한 엄마 작가의 북토 크였다. 작가님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맞아! 저런 말은 저 때나 들을 수 있는 말이지.' 하면서 그때의 기억들을 놓쳐버린 나를 자책하던 중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작가님의 애와 나의 애는 선천적으로 다르지 않은가. 작가님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위트 있는 아이였을 수 있다. 반면 나의 아이는 어릴 때도 그다지 잘 웃지 않는, 말은 더더욱 짧고 경제적인 아이였다. 가정환경도 무시할 수 없다. 아이의 엄마인 나도 언어의 경제성을 선호한다. 말은 짧고 간단하게, 할 말만. 그런데 아이에게 그 이상을 바라면 양심 없는 거 아닐까? 그리고 MBTI가 T인 엄마는 공감능력이 한참 떨어지고 P이기까지 해서 꾸준한 기록은 불가능하다. 아이도 엄마도 작가님네와 다르다는 결론에 이르면서 책대신 다른 무언가를 남겨줘 보자고 생각했다. 그 무언가는 아직 미정이지만 이 사춘기를 원만하게 보낼 수 있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우리 모두에겐 소중한 선물이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일단 엄마가 이 갱년기를 잘 보내야 한다. 인내는 이미 한계선을 지나 몇 차례 폭발했기에 인내만으로 버티진 못할 것 같다. 그 무언가가 더 필요하다. 갱년기를 최대한 갱년기스럽지 않게 보내보기로, 사춘기 딸과의 전쟁으로 피비린내 나는 상처를 남기지 않도록, 어른으로서 엄마로서 나만의 일을 찾다가 글쓰기를 선택한다. 아이에게 쏟아놓지 못하는 모든 말들을 (그게 욕지거리일지라도) 여기에 글로 기록해 놓으려고 한다. 키보드를 대나무 숲 삼아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한껏 소리쳐 보려고 한다. 아이에 대한 험담이 대부분일 수 있겠지만 엄마는 쓰면서 마음을 다스릴 계획이다. 그래서 이 시기를 평화롭게 보낼 수 있다면, 그래서 아이에게나 미래의 나에게, 또는 나와 같은 시간을 보내는 엄마들에게 자그나마 위로가 된다면 글쓰기는 제 몫을 다하는 것이리라. 앞으로 매 순간 터지는 복창과 너덜 해진 심장을 부둥켜안고 기록할 것이다. 갱년기 엄마와 사춘기 딸의 하루하루를.
말 잘 들으면 아이가 아니다.
나도 저 때 말 잘 안 들었으니 돌이켜보면 어긋나는 순간들이 많았고
나 때문에 부모님 속도 썩어 문드러졌는데
‘내 아이는 그러면 안 돼’라는 시건방진 생각은 대체 뭘까?
내 속만 편하게 생각한다고 반성부터 하게 된다.
요즘 부쩍 아들과 이야기할 기회가 많은데 말할수록 내 아이가 맞나 싶다.
15년 전 내게서 분화되어 독립된 또 하나의 주체로 인정해야 하는
시점이 온 것 같다.
<굶주린 마흔의 생존독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