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까지 비가 제법 내린 듯합니다. 어제저녁에는 식사 준비를 하다가 천둥소리에 깜짝 놀랐어요. 너무나 가까이 그리고 큰 소리에 어찌나 놀랬는지요. 놀란 엄마를 보고 자기는 번쩍하는 번개를 봤다며 이미 올 것을 안 천둥에 하나도 놀라지 않았다고 딸은 으쓱하며 말합니다. 지은 죄가 있는 것도 아닌데 요즘엔 왜 그리 천둥소리에 심장이 벌렁거릴 정도로 놀래는지 모르겠습니다. 나이 듦일까요.
다행히 아이들 학교 갈 시간에는 비가 그쳐줬네요. 그 덕분에 비가 온 거리를 걸어보게 되었습니다. 귀에 꽂은 라디오에서도 그렇고 모두들 비가 온 후 쌀쌀해진 날씨를 얘기합니다. 그렇잖아도 오늘은 평소보다 옷을 더 껴입고 나와봤어요. 완연해지는 가을 정취가 참 좋긴 한데 운동 나올 때 점점 옷이 무거워지는 건 살짝 싫습니다. 조만간 손에 장갑도 껴야겠고 더 두터운 외투를 찾아 입어야겠죠.
스산하지만 그래도 나와보면 소소하게 감탄할 일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지난주와도 확연히 달라 보이는 나뭇잎은 더욱 짙어져 있습니다. 비가 왔기 때문에 나뭇잎이 많이 떨어져 있겠지 싶었는데 역시나 거리 전체는 단풍 물감이 콕콕 찍어져 있습니다. 이 거리를 어찌 걷지 않을 수 있고 눈에 담아내고 싶지 않을 수 있을까요.
발길 닿는 곳 그 어디에도 눈을 뗄 수가 없습니다
오늘도 역시 항상 걷는 집 근처 공원에 왔습니다. 매번 같은 곳을 걷는데도 그날그날 풍경이 같지 않습니다. 요즘같이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계절 앞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나뭇잎 한 장에도, 사람의 표정도, 옷차림도, 아이의 웃음소리도 달라 보입니다.
오늘은 특히 더욱 변화무쌍한 날이었어요. 한 시간 반 정도의 걷기 중에 여러 하늘과 바람 그리고 햇살을 느꼈거든요. 나무에서 맺어 있던 약간의 빗방울이 바람에 날려 후드득 떨어지기도 하고, 잠깐은 먹구름으로 주위가 어둑해지기도 했습니다.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햇살이 좌악하고 반짝이기도 합니다. 오늘의 장관은 바람이 만들어주었죠. 바람이 부니 낙엽비가 내립니다. 어김없이 산책 나온 병아리 꼬마들은 그 아래에서 빙글빙글 돌며 낙엽을 까르르 맞이합니다. 제 눈 앞에 펼쳐진 이 영화 같은 장면은 너무 한 순간이라 도저히 카메라에 담을 수가 없네요. 제 머리에도 떨어지는 나뭇잎을 그저 함께 즐겨봅니다. 지금이라도 첫사랑이 이루어질까 하는 엉뚱한 생각도 하며 웃어 봅니다. 이렇게 찬란한 찰나의 순간을 제 눈에나마 담아봅니다.
이렇게 차가워도 꽃은 여전하고, 배추도 익어갑니다
낙엽만 연신 쳐다보며 걷다 한 곳에 무리 지어 피어있는 꽃을 봤어요. 이런 날씨에 아직도 꽃이라니 하늘의 무슨 조화인가 싶어 가까이 가 꽃을 봅니다. 스산한 가을 풍경에도 '나 아직 죽지 않았어'하며 짠하고 등장하는 말괄량이 같습니다. 오래도록 버텨주기를 바랍니다.
다른 한쪽에서는 배추가 갑자기 보였어요. 공원에는 구민들이 작게 주말 농장 하는 자리도 있는데요. 이렇게 배추가 자라고 있을 줄은 그동안 몰랐습니다. 이제는 뽑을 때가 되어 보입니다. 어서 김치로 만들어줘야 할 만큼 배추가 잘 자랐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지난 주말에는 저도 김장을 하고 왔거든요. 햇살 좋은 날 시골 마당에서 자리를 척하니 펼쳐놓고 동네분들과 함께 품앗이 김장을 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하니 후딱 이었습니다. 김장하는 날에 빠지면 섭섭한 보쌈도 맛있게 먹고 왔습니다. 김장을 마치고 나니 팔뚝은 좀 아프지만 마음이 참 한가 해지네요. 지금은 베란다에 놓여 있는 김장 김치들은 내일쯤 김치냉장고에 넣을 예정입니다. 냉장고에 꽉꽉 채워져 있을 김치통을 보면 이 겨울 든든해지겠죠.
예전에 단풍철 조금 지나서 캐나다를 다녀온 적이 있었어요. 한창때가 지나서 봤기 때문이었기도 했지만 그래도 조금은 실망했었어요. 그림엽서 같은 캐나다 풍경을 그래도 기대했었나 봅니다. 그런데 한국에 돌아와 보니 그 보상이라도 하는 듯 동네 풍경이 더 예뻤던 기억이 납니다. 요즘이 딱 그런 때인 것 같아요. 멀리 설악산이나 내장산은 못 가더라도 이 거리 풍경은 정말 단풍국 부럽지 않은 풍경입니다. 여러분도 걸으면서 이 계절을 많이들 만끽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