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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영 Sep 19. 2019

낯가리는 사람의 세가지 직업 이야기

비건키친 운영 일기. 7

나만의 어려움

채식 식당을 하면서 가장 큰 (나에게만) 어려움이 다.
바로 낯가림.
지금까지 나의 직업은 모두 사람을 대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전혀 문제는 없었다.

대기업 MD란

하루에도 너 다섯 개의 협력사와의 미팅이 잡히고, 수십 개의 브랜드와 대화로 협의해야 하는 MD의 일.
그때 나는 회사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대기업의 유통 MD 그리고 상대방은 회사와 거래를 잘하고 싶은 협력사.
대화의 주제나 목적은 매출로 항상 같았고, 그 외 사적인 이야기가 들어갈 이유도 나를 드러낼 필요도 없다.
특히나 MD 시절의 나는 그렇게 딱딱한 사람일 수 없었다.


계약서 상 갑의 입장.
솔직하게 말하면 협력사의 매출을 쥐락펴락하는 대기업 MD는 모든 협력사들이 잘 보이고, 친해지고 싶은 존재였다.
그렇게 인간적으로 친해지거나 작은 성의표시라도 받게 된다면, 일을 그르치게 된다.
그에 대한 기대를 본인 회사의 매출로 뽑아내기 원한다.
그렇게 되면 사실 MD가 휘둘리는 거다.
(협력사로부터 금품 수수를 받는 MD들이 알게 모르게 아주아주 옛날엔 있었다. 무려 십몇 년 전 옛날이야기.
요즘은 이런 건 말도 안 된다. 네이버 쇼핑 등 다양한 채널이 늘어나 파워도 떨어진 것도 있고.)


사실 식사 정도는 가볍게 먹기도 하는데, 당시 나는 점심 약속조차 안 잡아주는 협력사 대표님들이나 담당자에겐 나이도 어리고, 딱딱한 아주 대하기 힘든 MD였을 것이다.
가끔 큰 협력사들은 팀장님께 요청해서 같이 점심 약속을 잡을 정도로 그 부분만큼은 참 융통성 없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낯가림의 성격 탓도 작용했던 듯하다. 미팅이 아닌 식사 겸 미팅이 되면 어느 정도 개인적인 부분을 공유하게 되는 점도 불편했던듯한.

이런 내가 두 번째 직업을 가지게 되었다.

강사란

요리 강사.
이것만큼 사람을 많이 대하는 일도 없는데 나는 왜 이걸 하게 된 걸까.
시작하게 된 계기는 스토리가 길어서 이건 나중에 따로 이야기를 풀어야겠다.


처음 수업을 시작했던 까마득했던 시기의 나는 그 일이 참 재밌고 즐거웠다.
참고로 낯가림이 있지만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걸 두려워하는 편은 아니다.
TMI이지만 초, 중, 고 시절엔 극성맞을 정도로 활발했고, 반장 아니면 학예부장을 맡는.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운 시절이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던 학창 시절이 가고, 여러 풍파를 맞으며. 차분해졌다.
특히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던 시절, 어려운 일들로 많은 변화가 있었고, 그와 동시에 성격이 많이 바뀌었다.
어쨌든.
그리하여 나의 낯가림과는 별개로 말하는 직업이 수업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그리고 채식이나 비건에 관심 있으신 수강생분들은 어느 정도 마음이나 경제적인 여유가 있으신 정말 유하고 좋으신 분들이 대다수이다.
예전엔 수업 시작하기 전에 일일이 통화를 하며 어느 정도 첫 만남 전에 친밀감을 쌓아놓는 편이었는데 이제 그럴 필요도 없이 참 자연스러워졌다.


강사는 수강생분의 니즈를 채워주면 된다.
수업을 참 열심히. 남기는 것 없이 잘 가르쳐주면 된다.
(어떤 수강생분이 선생님 너무 다 알려주지 마세요.라고 끝나고 가서 말씀해주실 정도로.)
나 역시 나를 믿고 와주신 분들이니 그분들에 대한 무한 신뢰가 처음부터 쌓이게 된다.
낯가림이 있지만 알게 되면 진심으로 깊이 있게 친해지는 편이라 수강생분들과의 관계가 꾸준히 간다.
지금은 수강생분들이 나의 든든한 인맥들이자 내 편이 되었다.

그런데 채식 식당은 왜 힘들어?

마음의 안정을 찾는 브레이크 타임
불특정 누군가의 불시의 방문

물론 어떻게 보면 앞의 두 직업을 통한 관계보다 훨씬 짧고, 단편적인 관계니 쉽다고 생각할 수 있다.
온 손님들은 맛있는 식사를 원하고, 나는 그에 맞춰 제안하면 된다.
하지만 맛있는 식사-라고 하는 지표가 참 애매모호하다 .

이전 글에 누구의 입맛에 맞출 것인가라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다수의 입맛을 맞추는 건 참 어렵다.

게다가 비건 요리인 줄 모르고 오시는 분들 또는 인공적인 감미료 맛에 익숙하신 분들이 오실 경우를 생각해도 겁이 났었다.
그래서 처음 오신 손님은 식사를 다 하실 때까지 긴장된다.
다행히 지금까지 오신 분들은 맛있게 드시고 가셔서 긴장은 점차 줄어들고 있다.

식당이나 카페도 마찬가지겠지만.
불특정 누군가인 손님이 불시에 방문한다.
나는 처음엔 이게 참 두려웠다.
나 혼자 있는데 이상한 사람이 들어오면 어떡하지.
화가 많은 사람이 들어오면 어쩌지.
참. 이상한 생각들이다.

이런 적이 있었다.
어떤 중년의 아저씨가 들어오셨다.
말씀을 하시는데 어눌하시다. 내가 얘기를 해도 뭔가 안 통하는 느낌.

고민하다가 영어메뉴판을 드릴까 싶어 질문했다.
조심스레 "혹시 외국인이세요?"라고 여쭤보았다.
"일반인!"이라고 딱 잡아 말씀하셨다.
그냥 말이 어눌하신 건데 내가 실수했구나 싶어서 기분이 언짢으셨을까 봐 그다음부터 손이 덜덜 떨렸다.
조심스레 서빙을 마치고 들어가면서 보게 된 아저씨의 핸드폰은 일본 사이트가 열려있었다.
한국에 거주하신 지 꽤 된 일본분이신듯해 한국말도 약간 하셔서 더 헷갈렸다.일반인이란 건 바로 일본인이라고 하신 거였다.
그제야 안심이 된.
식사가 끝나고 여전히 떠듬거리는 한국어로 맛있어요!라고 하신 아저씨에게 감사하다고 활짝 웃으며 인사드렸다.

운영한 지 3개월이 되면서 오신 손님들의 경험치로 인해 불특정 상상 속 다양한 손님들에서 이제 반가운 손님으로 인식되었지만 여전히 살갑게 말을 붙이기 어렵다.
와주셔서 고맙고, 반갑지만 그냥 말 붙이기가.
그 대화의 시작이 참 어색하고 어려워서 조용히 주방으로 들어간다.
이것도 점점 나아지겠지.

투박한 진심


사람을 멀리 하고선 할 수 있는 일들이 없다.

나의 낯가림도 상대방에게 종종 어색함을 줄 수 있지만 그보다 상대방이 더 확실하게 느낀 건 투박한 나의 진심이었다.


MD였을 때도 협력사들의 매출이 올라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진행하다 보니 그들도 믿고 따라와 주었고, 좋은 결과가 있을 땐 나의 진심처럼 그들도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강사일 때도 하나라도 더 알려주려는 진심을 알고, 부끄럽지만 강사님이 아니라 스승님이라는 진심 어린 감사의 마음도 받았다.

채식 식당에도 진심을 담아 요리하고 말하지 않아도 손님의 빈그릇으로 진심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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