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가 아플까,갱년기가 아플까

by 소믈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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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의 태양은 여느 때처럼 진한 존재감을 보이며 떠올랐습니다.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마음을 환하게 밝히는 그 빛이 저의 내면까지는 닿지 못한 모양입니다. 마음속에, 하루에도 몇 번씩 크고 작은 파도가 일렁입니다. 멍하다가도 바쁘고, 울다가도 웃습니다. 자처해서 떠도는 나그네라기엔 처연하고, 길 잃은 망아지라기엔 갈피 없이 움직입니다. 집에 있어도, 밖에 있어도 마음 누일 곳이 없습니다. 공중부양하듯 떠 있는 마음은 어디에 자리 잡아야 할지 몰라 헤매는 중입니다.


"아이랑 밥 먹으려고 식탁에만 앉으면 심장이 두근거려."

나흘 전 만난 30년 지기 친구를 만났습니다. 대화 시작과 동시에, 중학교 3학년이 되는 딸과의 전쟁이 무섭다고 했습니다. 외할머니 댁에 안 따라온다던 딸이 마음이 바뀌어 같이 내려왔고, 아이 눈치를 보느라 나왔다고 했습니다. 출근해야 해서 혼자 일요일에 먼저 올라가고, 딸은 화요일에 올라오게 할 거라고. 이틀 동안 혼자 평화롭게 있을 생각하니 속이 다 시원하다며 웃더군요. 그러나, 또 마음이 바뀐 아이는 일요일에 같이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다음 날, 수화기 넘어 들리는 친구 음성에는 한숨이 여러 번 흘러나왔습니다. 왜 이리 남 일 같지 않은지요.


해가 바뀌어도 일상은 그대로입니다. 아이들 방학은 오전에만 누릴 수 있는 고유의 활기마저 삼켜버립니다. 느슨해진 아이들 리듬에 전염된 걸까요. 무기력증에 가까운 12시간의 숙면을 취하고 일어나도 몸이 무겁습니다. 집 안 구석구석은 볼 것도 없이 엉망입니다. 홈런볼처럼 뭉쳐진 먼지가 굴러다니고, 현관을 들어서면 쓰레기 소각장에서나 날 법한 냄새가 코끝을 찌릅니다. 먹다 남은 딸기우유 팩, 요거트 용기, 과자 봉지도 침대 옆과 책상 위를 점령하고 있죠. 늦게 발견 한 우유팩 안은, 곰팡이가 그린 지도로 빼곡합니다.

치우라고 하면 잔소리가 될까 봐, 손끝에 무게 추라도 달린 양 천천히 몸을 움직여 쓰레기를 담습니다. 엄마가 내뿜는 냉기를 눈치채는 건 둘째뿐입니다. 첫째는 그러거나 말거나 제 할 일에만 몰두하죠. 치우라고 하면 "나중에", "이따가", "내가 알아서 할게"라는 거절 3종 세트만 들아 옵니다.


답답했습니다. 일은 손에 잡히지 않고 집중력은 바닥을 치고 내려갑니다. 평소 좋아하던 동네 산책도, 이웃과의 맥주 한 잔도 싫습니다. 겹겹이 쌓인 불만이 제 안을 파고듭니다.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자니 못난 엄마이자, 나약한 어른임을 증명하는 것 같아 몰려오는 한을 뱃속 깊이 눌러 담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2박 3일 정도 어디론가 떠나고 싶기도 합니다.

저를 아는 이가 아무도 없는 곳, 되도록 먼 곳이면 좋겠습니다. 살면서 한두 번 가본 게 전부인 전라도의 낯선 풍경이 보고 싶어지더군요. 타인의 일상, 익숙한 곳을 벗어나 새로운 곳에 있다 보면 조금이나마 내면을 환기시킬 수 있을까요.

얼마 전 만난 지인은 자녀들의 사춘기 시절, 밤 드라이브로 분을 삭였다며 몇 가지 코스를 추천해 주었습니다. 먼 일이라 생각하며 흘러들었는데, 어는 덧 와 있더군요. 그분처럼 자동차 전용 도로를 달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거 같습니다. 현실에서 완전히 동떨어진 곳에 고립되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니까요.


비슷한 처지의 친구와 통화를 했습니다. 성별만 다를 뿐, 아이들은 비슷한 터널을 지나고 있었고 엄마들의 감정선도 닮아 있었습니다. 아이에게 쏟아내지 못하고 혼자 삭이는 법이 서툰 우리는 혼란스럽습니다. 사춘기 때문인지, 갱년기 때문인지. 갱년기라는 진단이 나오면 호르몬 탓으로 돌리기라고 할 텐데 말이죠.

그 소동 속에 엄마와 형의 눈치를 보는 둘째 아이가 안쓰럽습니다. 첫째만큼 애정을 쏟지도, 세심히 교육하지도 못했습니다. 해 맑디 해맑은 영혼으로 자랐을 뿐, 학업 면에서는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아이가 따라오지 못하는 부분을 볼 때마다 가슴을 치게 됩니다. 혼내는 대신 '엄마 반성문'을 쓰면서요. "첫째에겐 관심을, 둘째에겐 교육을"이라던 육아 선배의 말이 이제야 공감됩니다. 지금이라도 붙들어야겠다고 다짐하며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아봅니다.


새해 들어 컵을 세 개나 깼습니다. 대단한 힘을 준 것도 아닌데 싱크대에서 하나, 냉장고 앞에서 하나, 식탁을 치우다 또 하나.

어쩌면 깨진 컵들이 저의 상태를 대신 말해주고 있습니다. 저도 모르게 틈이 생기고 있다고, 이 틈을 메우지 않으면 결국 깨지고 말 거라고. 깨진 조각을 붙이더라도 흔적은 남죠. 지금의 저는 틈이 생기고, 깨지고, 다시 붙이는 수많은 감정과 싸우는 중입니다.


가정이 불안하니 열정도 의지도 예전 같지 않습니다. 그나마 건강하게 도피하는 방법은 독서. 소설 속 인물들의 삶에 침잠하다 보면 "그래도 지금 내가 낫네"라는 어리숙한 위안을 얻게 되더군요.

사춘기를 보내는 아들과 사십춘기와 갱년기 사이를 오가는 엄마가 엉겅퀴처럼 얽혀 보낼 한 해. 이 시기가 어서 지나가길 바랍니다. 훗날 둘째의 사춘기가 올 때는 지금의 이 진통이 지혜로운 길잡이가 되어주길. 오늘보다 내일, 0.00001cm만이라도 나아지길 기대합니다.

수,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