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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蟾津) 강 봄에

by 라이테 Mar 16.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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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지역의 낮 최고 기온이 섭씨 20도를 육박했다. 목까지 감싼 머플러가 무색해 퇴근길에는 슬그머니 풀어 가방에 다독여 넣었다. 이대로라면 목련봉오리가 며칠 내에 벌어지겠구나, 산수유는 흐드러지고 남도의 매화축제장 덜 핀 꽃 때문에 아슬아슬 마음 졸이지 않아도 되겠구나 나도 계절이 주는 긴장을 마음 놓고 탁 풀어놓아도 이쯤이면 괜찮겠네 안도했다. 그랬는데 이틀 만에 꽃샘추위가 올 거라고 기상청이 요란했다. 봄꽃 기대했던 분주한 마음도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고 짐짓 늦봄 같은 날씨는 비구름을 몰고 온다고 했다. 일주일 전에 주말 기치표를 예매했던 마음은 틈만 나면 곡성의 날씨가 바뀌기를 기대하며 클릭질을 했다. 기온이 뚝 떨어져도 비만 아니면 다행이지.



여수행 무궁화열차여수행 무궁화열차

7시 34분 출발. 우리 지역에서  여수까지만 운행하는 두 냥 짜리 전라선 무궁화호가 있다. 곡성까지의 구간은 고속열차 의미가 별로 없기에 한 시간 남짓 소요되는 무궁화호를 선택했다. 요금도 편도 6,300원. 기차 낭만을 즐기려면 한 시간쯤은 타고 가야지.

기차는 삼례-전주-임실-오수-남원을 지나는 동안 초록이 선명한 보리밭도 보여주고 바짝 마른 자잘한 강을 건너 곡성역에 도착했다. 기차에서 내리기 전부터 바닥이 젖어있다. 섬진강 보러 간다 했더니 장난기 가득한 친구가 '거기 비나 와라' 해서 '보가 구름이라 어쩌나? 큭큭' 했는데 친구 말대로 진짜 비가 와버렸다.

비 내린 곡성역사비 내린 곡성역사

지난 두 번째 섬진을 만나러 갈 때에는 상촌파 오라비 같은 작가님이 늦가을 들어 가장 추운 날이라고 만류하며 걱정했었다. 짓궂은 친구는 비 걱정대신 되려 비오라고 보탠다.

곡성역 대합실에 앉아 비옷이나 우산을 살만한 편의점이 근처에 있는지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20여분쯤 지나니 남쪽하늘부터 조금씩 밝아졌다.

 9시 30분 증기기차를 타려면 더는 지체할 수 없어 아직 우중인데 나섰다.

기차마을 후문 매표소를 통과한 안쪽 전경기차마을 후문 매표소를 통과한 안쪽 전경

기차마을 매표소에 이르니 첫 시간 증기기차는 4월부터 운행하고 11시 기차가 가장 이른 시간이란다.

한 시간 반을 어디서 보내나 하다가 경유하려 했던 기차마을을 입장하기로 했다. 여긴 곡성의 랜드마크로 그 이름에 걸맞게 장미시즌이 화려한 곳이다. 솜씨 좋은 이발사가 매만져준 우리 오빠 중학생 때 머리처럼 장미 가지들을 정갈하게 잘 쳐냈는데 거기 새싹이 막 삐져나오고 있었다.

장미 새싹장미 새싹
빗물 젖은 영춘화꽃잎빗물 젖은 영춘화꽃잎
산수유나무산수유나무

 폐역의 빛바랜 역사(驛舍)처럼 조금은 쓸쓸하고 고즈넉한, 내 걷는 속도나 멀리 대관람차 움직이는 속도만큼 아무 급할 것도 없는 풍경이었다.

유료와 무료 이용시설이 군데군데 구획을 나누어 잘 정비되어 있었다.

어머나, 공연장 근처에 이르니 멀리서도 눈을 단번에 이끄는 수수한 노란색이 보였다. 초록 속에 섞여 있으면 눈에 띄지도 않을 고동색 가지에 수줍게 노란 꽃잎을 매달고 있었다. 개나리다. 남쪽이라 더 빠른가 싶다.

공연장 내벽공연장 내벽
기념품샵기념품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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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품샵 내부

처마에 따스한 색깔의 불빛을 달고 기와를 인 고풍스러운 건물이 있기에 돌길을 총총 건너서 한옥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기념품샵이었다. 젊은 청년이 혼자 가게를 지키고 있었다. 지역 특산품과 문구류, 피규어, 펜던트 등 상당히 다양한 종류의 아기자기한 물건들이 정갈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가격표도 다 붙어있어 별도의 물어볼 말도 없겠지만 있다 해도 조곤조곤 속삭이듯 물어야 할 것 같다. 조도 낮은 조명과 클래식 음악이 낮게 퍼지고 향긋한 내음이 풍겨 나오는 이색적인 기념품샵이었다.

날씨와 여행객의 산보는 그렇게 달팽이처럼 눅눅하고 느릿했다.

왁자지껄한 소음이 들리는 곳을 향하니 증기기차 타는 곳이었다. 청주에서 출발한 신우회 소속 팀들이 펼침막을 앞세우고 단체 사진을 찍는 중이었다. 출발 시간이 30분쯤 남았는데 기차는 벌써 증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사진 촬영하고 싶은 관람객을 위한 배려가 아닌가 싶어 마음이 좋았다. 나도 셀카로 한컷, 거기 마음 넉넉하게 생긴 분에게 사진 촬영을 부탁했다. 이럴 때 동행인이 조금 아쉽기는 해도 혼자 여행이라 좋은 점이 참 많다. 단출하니 번거롭지 않고 언제든 양해 구하지 않아도 계획변경이 자유롭다. 식사도 현지식으로 먹든지 간단히 주먹밥이든지 상황 따라 하면 된다. 기차 내에서도 소란스럽게 떠드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 삼삼오오 동행하는 동년배 아점마들 보면 혼자일 때보다 더 기세등등 용감해져 혼자일 때는 하기 곤란한 민폐 행동도 하기 십상이다. (민폐행동 이건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견해다.) 그런 까닭에 혼자 여행의 맛이 참 좋다. 혼자라서 쓸쓸하지도 외롭지도 않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매표창구로 갔다. 기차마을을 출발하여 가정역에 도착하는데 30분 소요. 12시부터 점심시간이라고 레일바이크를 타려면 지체하지 말고 바로 타야 한다고 매표하시는 분이 아주 친절하게 설명해 주셨다.

증기기차에 오르니 검표를 하고 출발을 알리는 기적 소리가 울렸다. 마치 첩첩산중 산 너머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소리 같은 어린 증기기차의 기적소리가 만화 속 토마스기차처럼 귀엽다. 우렁차지도 않으면서 아련하고 청아하기까지 하다. 기관사님께 부탁이 가능하다면 기차 운행 하는 동안 열두 번쯤은 소리를 내주셨으면 하는 엉뚱한 생각도 들었다.

증기기차 내부 익살스런 점원과 이동식 매점, 사진촬영용 교복증기기차 내부 익살스런 점원과 이동식 매점, 사진촬영용 교복

증기기차 내에는 익살스러운 분장과 추억의 교련복을 입은 점원이 판매하는 이동식 매점(손수레)이 있다. 오래전 춘천이나 삼척 언니집 가는 열차 에서 사 먹었던 계란 꾸러미나 아버지가 드셨던 캔맥주와 마른오징어, 동글동글 작은 귤이 순식간에 떠올랐다.

섬진강을 따라 달리는 증기기차 창밖으로 나란히 보일 듯 말듯한 섬진강이 감질나게 아쉽다. 어서 그 우렁찬 물소리를 듣고 하얗게 이는 포말을 가슴 가득 담았으면 싶어 마음이 급해졌다.

증기기차 타고 가는 길에 보이는 창밖 풍경증기기차 타고 가는 길에 보이는 창밖 풍경
가정역에 도착한 증기기차가정역에 도착한 증기기차

어느새 11시 30분. 기차마을을 출발한 증기기차는 가정역에 도착했다. 증기기차 한 냥을 다 차지한 청주 신우회 소속팀원들에게 밀리면 점심시간 전에 레일바이크 타기가 어려울 수 있겠다 싶어 서둘러 매표소를 향했다. 다행히 그들은 바로 돌아가는 기차에 오른다고 해서 안심이었다. 본격적인 꽃철이 아니라서 그런지 레일바이크를 타시는 분은 거의 없었다.  물 위에 검은 돌인가 했더니 돌이 움직인다. 돌이 아니라 오리였다. 오리 가족이 자맥질을 하고 둥둥 떠다녔다. 저들이 겨울을 잘 이겨냈구나 싶으니 기특했다. 강물 오염으로 먹을만한 물고기들이 줄어드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혼자 유유자적 섬진강에 시선을 떼지 않고 반환점인 압록을 찍고 다시 가정역으로 회귀했다.

레일바이크 반환점레일바이크 반환점

날씨가 서늘한 탓에 점심 식사는 주먹밥 대신 구름다리 옆 구름다리 가든에서 혼밥 하려고 마음먹고 왔다. 리 알아본 두 군데 중 한 곳은 증기기차 타고 오는 길에 보니 폐업을 했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식당을 향해 걷는데 연통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영업을 하는구나. 안 그럼 추운 날 속이 빈 채로 간식 부스러기로 때우는 수밖에 없을 텐데 고마웠다.

반가운 마음에 문을 힘차게 열고 들어서자 난로를 피워 그런지 공기가 훈훈했다. 인심도 훈훈했다. 식전에 난로 위에 올려놓았던 주전자의 구수한 둥굴레차를 컵에 내오셨다. 둥굴레가 국산인지 중국산인지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기사식당도 아닌 관광지에서 혼밥 손님을 귀찮아하지 않는 게 고마울 뿐이었다. 오히려 기본 상차림보다 더 푸지게 상을 차려주셨다. 내가 선택한 음식은 재첩국. 비 오라고 짓궂은 장난을 한 친구가 재첩귀신이라는데 맑지도 텁텁하지도 않은 불투명 뿌연 국물이 슴슴하면서 비린내도 없이 그렇다고 감칠맛도 없이 딱 시골 아낙의 장날 차림새처럼 무뚝뚝했다. 재첩국은 그런 맛으로 먹는 것이지. 강물을 닮은 푸른빛 도는 뿌연 국을 눈으로 먹고 손톱보다 작은 재첩을 까느라 지문이 닳아졌을 법한 얼굴도 모르는 이의 정성을 고마워하며 먹는 것이지. 게다가 지난가을 파종한 시금치가 겨우내 밭에서 월동하다 역시 함께 동거한 여린 쑥을 주인이 직접 캐서 끓였다는 시금치쑥국도 종지만큼 내주었다. 반가워서 사진 찍을 겨를도 없이 먹다 보니 한 숟가락 남았다. 민망하지만 그거라도 사진으로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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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첩국

엊그제까지 날씨가 좋아서 점심 손님이 붐빌 줄 알고 반찬을 많이 준비하셨다는 푸념을 하시면서 백반 상에 나오는 돈육볶음을 푸짐하게 내주셨다. 웃돈을 바라지도 않는 소박한 손길이었다. 점심상을 정성껏 차려주셨으니 먹는 나도 정성을 들였다. 혼밥인데 염체 없이 오래 머물렀다. 혹시 식당을 못 만나면 먹으려고 준비했던 것들을 배낭에서 꺼냈다. 커피, 비스킷, 에너지바. 그리고 물 건너온 망고젤리(이것은 고마운 상황에 답례로 쓰려고 특별히 챙겨 온 것. 그런 용도의 것을 따로 챙기는 습관이 있다.) 드리는 마음도 받아주시는 마음도 이심전심 통했다.

구름다리 건너편에 청소년 야영장이 있다.

 드문드문 캠핑하시는 분들 텐트와 캠핑카가 그림처럼 흩어져 있었다. '시향가'라고 크게 쓴 배너도 세워져 있는 게 단체에서 친목을 위해 오신 것 같기도 했다.  청소년 야영장을 더 지나 5분쯤 걸으니 곡성섬진강천문대가 나왔다. 하필 운영시간이 14시부터였다. 내가 돌아갈 증기기차의 시간이 13시 45분이었다. 아쉽지만 발길을 돌려야 했다. 분명 곡성섬진강천문대였는데 진입로 입구에 구례군 관광안내도가 세워져 있어서 의아했다. 곡성청소년야영장과 천문대 사이에 실개천이 나 있는데 실개천을 지나는 작은 다리에서부터 구례군이 시작되는가 보다 짐작했다. 손 안의 지도를 꺼내 살펴보니 그곳이 구례군으로 포함되고 있었다. 곡성군과 구례군 지자체끼리 천문대 이름으로 마찰이 좀 있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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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야영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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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섬진강천문대곡성섬진강천문대
브런치 글 이미지 25

다시 구름다리를 건너 식당 계단을 따라 물가로 내려갔다. 계절이 바뀌어도 물소리는 여전했다.

일부러 물길을 돌리지 않는 한 그침도 없이 싫든 좋든 상류에서 내려보내는 대로 다 받아주고 또 욕심도 없이 받은 대로 다 내려보내는 섬진강물. 물멍을 하고 물소리를 담았다.


다시 증기 기차를 타고 기차마을로 돌아왔다. 기차마을을 벗어나면 곡성역 가는길에 토요일마다 열리는 플리마켓인 뚝방 마켓이 있다. 매주 토요일 11시~18시까지 운영한다. 노란 차일이 드리워져 멀리서도 눈에 확 띈다. 기차 시간이 한 시간쯤 남아 뚝방 마켓 구경을 했다. 주로 핸드메이드 소품류와 지역 특산품으로 만든 먹거리를 판매한다. 야외 공연장에서는 이름 모를 가수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실력이 아주 좋았다. 오후로 넘어서자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가죽으로 만든 자동차열쇠집을 하나 골랐다. 흥정 재미를 좀 볼까하다 날씨가 추운데 오래 서 계신게 수로울것 같아 그만두었다. 손님은 제법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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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방마켓

보름 남짓 후쯤이면 섬진강은 강가 나무들에 물 댄 수고를 벚꽃 향연으로 잠시 시름이나 달랠 수 있을까. 그 수고를 보상받을 수 있을까. 그때도 섬진의 강물은 여전한데 벚꽃 향연이나 펼쳐야 여행객의 시선을 덤으로 받을 수 있겠지 싶으니 어쩐지 미안하다. 산수유니 매화니 십리 벚꽃이니 볼만한 진풍경을 잔뜩 품고 있으면서도 정작 주목받지 못하는 그저 사철 흐르는 강. 그런 존재가 섬진(蟾津) 너뿐이랴.




여기저기 봄이 왔네 아직 봄이 가까이 오지 않았네 봄타령이 한창이다. 사계절 중 유독 더 간절하게 기다리는 계절은 봄이다. 인생의 찬란한 날들을 축복하며 비는 마음으로 건네는 인사에 낄 수 있는 계절도 봄이고 꽃길만 걸으라는 그 꽃길 배경이 되는 계절도 봄이다. 그러니 시샘이 없을 리 만무하다. 시나브로 오는 계절. 빈 가지에 초록잎도 없이 대뜸 꽃부터 내주는 인심 좋은 계절 봄. 통 크게 동백과 모란으로 앞 뒤 문지기를 세우고 떠날 때는 미련 없이 깔끔하게 후두득 후두득 자리를 비켜주고야 마는 봄.

그런 봄이 오느라 황사가 일고 빗방울도 흩뿌리고 그렇다.

계절도 마음도 몸살 없이 거저 오는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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