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받은 선물
두 사람은 여울의 거실에서 방금 겪은 일을 실감하지 못하고 경직된 몸을 그대로 둔 채 눈만 껌벅거리고 있었다. 수인이 정신을 차리고 혜윤에게 물었다.
"아, 이게 무슨 일이지? 괜찮냐?"
"응. 괜찮아. 그런데 뭐지? 이거 꿈도 아니고. 너무도 생생해. 지금도 심장이 터질 것 같아."
혜윤은 함께 잡고 있던 수인의 손을 무의식적으로 냅다 뿌리쳤다. 머쓱하니 버려진 굳은 손을 다른 손으로 주무르며 수인이 다시 물었다.
"넌 거기 왜 매달려 있었던 거야?"
"모르겠어. 장면은 매달려 있는 부분부터였는데, 내 머릿속에는 약속된 뭔가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찾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 찾았다고도 느꼈는데 그게 뭔지 모르겠어."
"뭐 그리 복잡한 거야? 그럼 대체 난 거기 왜 있었던 거지? 아무런 목적도 없이? 아, 죽을 뻔한 너를 구할 목적? 생각해 본 적도 없는데. 뭔 일이 일어날지 알 수도 없었을 건데?"
정신이 하나도 없는 두 사람은 거실에서 어느새 식은 김밥을 혼자 야무지게 먹고 있는 김여사를 발견한다. 수인은 후다닥 물을 떠 오고 혜윤은 급히 접시를 꺼내 김밥을 옮겨준다. 얼굴을 들어 싱긋 한번 웃고 난 김여사는 누군가를 기다리듯이 창 밖을 한번 내다보더니 물컵을 내려놓고 시무룩하다.
이튿날, 캠퍼스 구내식당은 붐볐다. 밥을 먹으며 수인과 혜윤이 손짓 발짓을 하며 뭔가를 설명하자, 동현과 전청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우와, 정말이야? 이거 웹툰소재감 아니야?"
"그러기엔 뭔가 부족한데 신기하긴 하다."
"야, 너네들은 친구들이 위험에 처했었는데 기껏 웹툰소재거리에 쓸만한가 따지고 있는 거야?"
혜윤이 동현과 전청을 나무랐다.
"내버려 둬. 어제오늘 일도 아니고."
수인은 입맛이 없어 국물을 숟가락으로 떴다 놨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혜운, 동현, 전청이 역시 먹는 둥 마는 둥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수인이 무심히 고개를 들었는데 창밖 햇살이 옆얼굴을 스쳐가며 그의 뚜렷한 이목구비를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옆에 앉은 혜윤은 아직도 이야기에 푹 빠져 있다가 수인의 옆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눈길이 멈췄다.
"뭐야, 이런 모습 처음이잖아. 까칠의 대명사 차수인이 이런 듬직한 외모였었나?" 혜윤은 얼른 시선을 식판으로 돌렸다. 동현과 전청은 점점 더 상상을 발전시키느라 분주했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야, 이런 건 그냥 사건이 아니야. 이거 진짜 웹툰 1화 오프닝으로 딱인데?”
“맞아. 주인공들이 협곡 절벽에서—와, 진짜 드라마틱하다.”
혜윤은 고개를 저으며 반박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때, 식당 다른 구역에서 들려오는 작은 웅성거림이 서서히 커졌다.
그곳엔 화려한 무리들이 있었다.
누가 봐도 잘 관리한 피부와 몸매에 어디서 구했는지 알 수 없는 폼나는 옷차림의 그들, 경영학과 3학년 선배 지장진과 마소야였다. 비서처럼 따라다니는 학생 몇 명이 쉴 새 없이 물컵을 바꾸고 수저를 정리해 주고 있었다. 그 중심에 마소야와 지장진이 앉아 있었다.
마소야는 검은 머리를 늘어뜨린 채, 자세를 곧게 하고 시선을 정면에 고정했다.
그 시선의 끝에는—지금 막 국을 떠먹는 수인이 있었다.
그녀의 눈매가 살짝 가늘어지더니, 옆에 앉은 지장진에게 힐끗 수인의 방향을 가리키며 말을 꺼냈다.
“야, 저 남자애 봐라. 키가 190은 훌쩍 넘을 듯한데, 얼굴이 조각 아니냐? 그냥 걸어만 다녀도 주위가 무대일 거 같아.”
마소야의 말에 지장진이 웃음을 흘리듯 대꾸했다.
“하… 우리 과 1학년 애들이잖아. 차수인 말하는 거야?"
"맞아, 근데 진짜 연예인 급이네. 몇 달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광고판에서 바로 튀어나온 것 같잖아.”
수인은 시선을 느꼈는지 마소야 쪽 허공을 잠시 응시했으나 그녀의 시선에는 닿지 않았다. 마소야는 그의 곧게 뻗은 콧날과 단단히 다져진 턱선, 묵직한 어깨와 길게 뻗은 팔다리를 빈틈없이 스캔하고 있었다.
"어머, 봤지? 나를 응시한 거. 저 조각상이 나를 주목했어."
지장진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적당히 해라. 전에 나한테도 지껄인 말 아니냐?"
지장진은 수인을 한 번 흘겨보고는 고개를 돌려 혜윤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젓가락을 쥔 그녀의 손끝이 작은 긴장을 담고 있는 걸 눈치채고는,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야, 마소야. 쟤 보이지? 수인 옆에 앉은 애.”
“벌써 뭘 골랐어? 서혜윤 말하는 거야? 응. 뭐, 귀엽네. 네 취향이 좀 독특하긴 하지. 너랑 딱 맞네.”
“질투하냐? 평범해 보이는데 이상하게 눈에 들어와. 네 말대로 오늘따라 귀여운 걸.”
그들의 대화가 오가는 동안, 수인의 무리는 여전히 자기들끼리 감정의 기복으로 투닥거리며 식사를 이어가고 있었다.
"하, 큰일 났다. 기말고사 준비 하나도 못했는데."
동현이 문득 생각난 듯이 말했다.
"아, 현실의 세계는 잔혹하구나. 수인이 너는 준비 좀 돼가? 족보라도 있으면 좀 줘봐라."
"있겠냐? 있으면 나도 좀 줘."
넷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들의 테이블 쪽으로 먹잇감을 찾는 표범처럼 느리게 걸어가면서, 마소야와 지장진이 그들의 대화를 훔쳐 듣고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식판을 들고일어나는 네 사람을 바로 막아서며 지장진과 마소야가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반사적으로 인사를 건네는 그들을 향해 거만한 표정으로 마소야가 말했다.
"응, 안녕? 족보 필요한 사람? 아! 다 필요하겠지? 일부는 내가 줄 수 있는데. 차수인 네가 대표로 받으러 와. 낼 오전강의 끝나고 과사로 오면 돼."
"그 절반은 나한테 있는데. 너 서혜윤 맞지? 나머지는 네가 받아가. 대신 밥 한번 사라. 공짜는 사람을 버려 놓거든. 여기로 연락해."
'직장인도 아니고 웬 명함?'
혜윤이 엉겁결에 지장진의 명함을 받아 들었다.
선배라는 두 작자들은 수인과 혜윤에게 반응할 여지도 주지 않고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쿨하게 사라졌다. 수인과 혜윤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고마운 거야, 재수가 없는 거야?"
혜윤이 조그맣게 중얼거리자 세 남자는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음... 과의 자타가 인정하는 재벌의 자제들이 순간 생긴 호기심으로 어린 물고기들을 낚시질하려고 하다니..." 이런 생각에 미친 동현과 전청이 자기들끼리 소곤댔다.
"이야~. 스토리라인 추가요."
"동현! 근데 막장 냄새나는 거 같지 않냐?
"연출이 생각보다 쉽겠는데? 막장이면 더 잘 팔리는 스토리로 갈 수도 있어."
그때 혜윤이 소곤거리는 두 사람에게 소리 질렀다.
"야! 무슨 상상을 하는 거야? 으유, 진짜 기분 나빠."
"아이, 깜짝이야."
놀란 척을 하는 그들에게 눈을 흘기는 혜윤의 어깨를 토닥이며 수인이 작게 말했다.
"흥분하지 마."
"너도 조용히 있어."
"응."
수인이 오늘은 웬일인지 혜윤에게 고분고분했다.
공부에 파트타임에 여울어머님 돌봄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점점 고갈되어가고 있었다. 지나는 길에 너도나도 여울의 집에 들르다 보면 어느새 대부분 여러 사람이 모이게 되는 경우가 많았고, 또 아까 봤어도 얼굴을 보게 되면 또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시간이 사라지기 십상이었다. 기말이 다가오자 웹툰까지 마감하느라 혼이 빠져나간 두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수인뿐 아니라 혜윤까지도 여울네 발길이 뜸해졌다. 집 안방불이 켜져 있고 실루엣이 두 명 이상이거나 불이 꺼져 있더라도 처마밑에 신발이 하나 더 있으면 각자 볼일을 봤다. 이는 누가 김여사와 함께 있음을 알리는 암묵의 신호로 모두에게 효율적이었다. 혜윤은 여울의 집 앞을 지날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었는데, 오늘따라 신경이 더 쓰였다.
'어머니, 곧 시험도 끝나고 방학이에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마침 안방창에 김여사와 남자 실루엣을 확인한 혜운은 안심이 되었다.
'요즘 계속 누가 있는데 수인인가?'
혜운은 확인하러 들어가 보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누르고 집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한참을 가다 그 실루엣이 너무도 익숙해서 혜운은 돌아섰다. 다시 여울의 문 앞으로 돌진했다.
'수인이 아니야!'
큰 문 비밀번호를 급히 누르고 현관 비밀번호도 빠르게 눌렀다. 그리고 노크도 없이 안방문을 열어젖혔다.
"어머니, 저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