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빛구슬 Jan 16. 2024

'나 하나쯤이야'란 말 경계하기

넓은 길 밖이요, 긴 하늘 아래

두르고 꽂은 것은 산인가, 병풍인가, 그림인가 아닌가.

높은 듯 낮은 듯, 끊어지는 듯 이어지는 듯

숨거니 보이거니, 가거니 머물거니

어지러운 가운데, 유명한 체 뽐내며 하늘도 두려워하지 않고

우뚝하게 서 있는 것이 추월산이 머리를 이루고

용구산, 몽선산, 불대산, 어등산,

용진산, 금성산이 허공에 늘어서 있거든

멀리 가까이 있는 푸른 절벽에 머문 것도 많기도 하구나


늘 그 자리에 있어 무심하게 바라보기만 했던 산을 누군가는 신이 빚어낸 걸작 정도로 생각했다. 자연에 대한 애정이 없다면 나올 수 없는 찬사다. 조선시대 학자 송순은 움직이지 않고 머물러 있기에 존재조차 잊게 만드는 산을 저리 표현했다.


송순이 산인가, 병풍인가, 그림인가 착각할 정도로 오묘하다 여긴 산은 무등산이다. 무등산은 광주광역시와 담양, 화순에 걸쳐 넓고 길게 뻗은 산이다. 2013년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지만 지역민이 아닌 이상 무등산에 대해 알고 있는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그 시절 송순이 바라본 무등산은 아름다웠다. 그가 무등산을 보며 느낀 경외가 정철이 관동별곡에서 금강산을 보며 느꼈다는 감흥과 별반 다르지 않으니 무등의 위상이 자못 대단하다 하겠다. 아니 한겨울 무등의 설산을 금강이 본다면 오히려 고개를 숙였으려나.


이런 무등산이 어린아이를 안듯 광주를 품어주고 있기에 광주 사람 누구나 동서남북 어느 곳에서든 그 당당함을 바라볼 수 있다. 그래서 특별히 여행할 곳을 찾지 못했을 땐 차를 타고 무등산을 돌고 오는 걸 즐긴다. 이는 돈을 들이지 않고 여행 기분을 느낄 수 있는 나만의 방법이기도 하다.


새해 첫 주말에도 무등산을 찾았다. 차를 타고 조금만 달리면 도심과 전혀 다른 얼굴의 자연을 만날 수 있는 건 행운이다. 빽빽한 나무들의 인사가 반가워 유리창을 열면 온풍기로 노곤해진 몸이 차가운 공기에 화들짝 깨어난다. 발아래 닥지닥지 모여있는 건물들의 다정한 모습도 보기 좋다. 굽었다 펴지고, 다시 굽었다 펴지는 길이 놀이공원에서 놀이기구를 타는 것처럼 신난다.


겨울 산이 주는 맑은 공기를 맘껏 마시며 달리다 보니 어느덧 대로변 입구에 다다랐다. 근처에 방문한 적이 있는 로컬푸드점이 있어 나온 김에 시장이나 볼까 하여 들렀다. 로컬푸드점의 채소들은 언제 봐도 신선하다. 신선함도 신선함이지만 가격면에서 경쟁자를 찾을 수가 없다. 그러니 공산품을 사려는 의도가 아닌 이상 이곳을 절대 외면할 수가 없지.


여기는 채소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충동구매 스폿이다. 물건 하나를 사러 왔다가 하나를 더 사게 되고, 상추를 사러 왔다가 부추까지 들고나가는 일이 허다하다. 투명비닐에 담긴 초록 잎들의 유혹이 어찌나 강렬한지 바리바리 싸들게 되는 것이다. 이것 역시 가격이 저렴해서 가능한 일이지만. 어느덧 카트 안의 채소들은 봉긋한 언덕을 이룬다. 그런 채소들을 뿌듯한 눈길로 바라보며 포장대로 향했다. 어라, 뭔가 허전하다. 포장대가 없다. 다른 곳으로 옮겼나 싶여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니다. 없다. 그러다 발견했다. 문에 붙은 문구 하나를.


 '잦은 테이프 도난으로 인해 포장대를 철거했습니다'


환경 문제로 대형마트의 테이프가 사라진 지는 오래되었다. 그럴 수 있다 생각했기에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런데 이곳의 사정은 조금 달랐다. 테이프뿐만 아니라 종이박스마저 없었다. 테이프가 없어진 이유 또한 황당했다. 잦은 테이프 도난이라니. 누가 얼마나 테이프를 가져갔기에 포장대가 없어질 정도에 이른 것일까. 예고 없이 들른 곳이기에 이런 상황이 무척 당황스러웠다. 불편함보다 포장대가 사라진 이유가 황당해서 헛웃음이 났다.


테이프를 가져간 사람들은 가져가는 일 자체를 도둑질이라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쓰라고 놓아둔 것인데 뭐, 그까짓 거 한다면 얼마나 한다고, 나 하나 가져간다고 티가 나겠어. 이런 생각들이 쌓이고 쌓여 두둑한 언덕을 이루다 결국 산으로 드러났을 것이다.


산을 달리며 느꼈던 상쾌한 기분이 뿌옇게 흐려졌다. 양심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길러지는 것이다. 사회의 일원으로 타인과 더불어 살며 타인의 모습을 거울삼아 나 자신을 바라보는 일에서 생긴다. 테이프를 가져간 사람들은 타인의 모습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나 하나쯤이야 하는 생각으로 다른 사람에게 미칠 파장은 고려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장 눈에 보이는 피해가 없다 하여, 행하는 잘못이 별 거 아니라는 이유로 양심을 더럽히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작은 일이 언덕을 이루고 그 언덕이 산을 이루듯 작은 먼지 하나도 경계해야만 한다.


2024년 즐거운 마음으로 나섰던 길에서 예기치 못한  경험을 했다. 우리 모두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는 사람으로 살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타산지석. 포장대 자리에 붙은 문구를 보니 갑자기 저런 고사성어가 떠올랐다.



이전 07화 시집살이는 낯선 언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