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돌이 마을의 저녁, 한 채의 집이 세워진 날
구월의 마지막 주일 오후, 우리는 깊은 산골로 향했다. 이름부터 정감 있는 ‘무지돌이 마을’.
그 이름만으로도 세월의 냄새가 묻어나는 듯했는데, 막상 도착해 보니 그 감정은 예상보다 훨씬 더 따뜻하고 풍요로웠다. 승합차에 몸을 싣고 꼬불꼬불 이어지는 산길을 달릴 때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은 마치 오래된 수묵화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황금빛 들녘이 물결치고, 산등성이를 타고 불어오는 바람은 도시에서 잊고 지냈던 계절의 냄새를 품고 있었다. 차가 멈추자 몇몇 사람들은 자연스레 차에서 내려 길가를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길을 따라 걸으며
“공기가 다르다”
“하늘이 더 높다”는 이야기를 나누는 목소리에는 설렘이 묻어 있었다.
골짜기를 따라 걷다 보니 산과 들 사이에 조용히 몸을 누인 듯한 집 한 채가 모습을 드러냈다. 홍현준 집사님 부부의 새 보금자리였다. 집 앞마당에서 반갑게 손을 흔드는 부부의 얼굴에는 오랜 기다림 끝에 맞이한 손님을 향한 진심 어린 기쁨이 배어 있었다. 사람들은 마당을 지나 집 안으로 들어서며 마치 자신의 집처럼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이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집 안은 아직 새 나무 냄새가 가득했지만, 그 안에는 벌써부터 누군가의 삶이 따뜻하게 자리 잡기 시작한 듯했다.
무심코 거실 창문을 활짝 열었을 때, 모두의 입에서 동시에 “아—” 하는 탄성이 흘러나왔다.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맑고도 부드럽게 거실 안으로 스며들어 공기를 단숨에 바꾸어 놓았다. 그 바람은 단순한 바람이 아니었다. 고요한 산의 품과 계곡의 속삭임을 한껏 실어온 듯 청량했고, 가을의 냄새와 함께 새 삶에 대한 축복을 전해주는 것만 같았다. 한참을 서서 그 바람을 맞고 있자니, 이 집이 앞으로 품게 될 따뜻한 시간과 잔잔한 평안이 눈앞에 그려졌다.
잠시 후, 아흔을 넘긴 박용두 장로님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여기가 왜 무지돌이라 불리게 됐는지 아시오?”
장로님의 목소리는 세월의 무게만큼 깊고도 따뜻했다. 마을 이름에는 오랜 시간 이곳을 지켜온 사람들의 삶과 바람, 그리고 돌처럼 단단한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모두가 귀 기울여 듣는 동안, 낯선 곳이라 느껴졌던 무지돌이 마을이 어느새 익숙하고 가까운 곳처럼 느껴졌다.
우리 교회가 있는 영오면 성곡리도 충분히 시골이라 생각했는데, 이곳 무지돌이 마을은 그보다 훨씬 더 고요하고 깊숙했다. 그래서일까, 공기는 더 맑고, 바람은 더 서늘하며, 산은 한층 더 푸르게 다가왔다. 그 고요함 속에서 20대 청년부터 90대 어르신까지 20여 명의 성도들이 모여 한마음으로 이 집의 새로운 시작을 축복했다. 누군가의 삶이 다시 피어나기 시작하는 자리에 함께 서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
예배가 끝난 뒤, 홍집사님 부부가 대접하는 식당으로 산 고갯길을 넘었다. 거기에는 따끈한 저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갓 튀겨낸 돈가스의 고소한 냄새가 허기를 자극했고, 곰탕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김은 한결같은 정성을 말해주는 듯했다. 메밀전병 한 입을 베어물 때마다 손맛과 마음이 함께 전해졌다. 무엇보다도 감동이었던 것은, 낯선 땅에서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며 자신들도 분주하고 피곤했을 텐데,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정성껏 음식을 건네고는,
“더 드세요”
“멀리서 와줘서 고마워요”라며 따뜻한 미소를 보내는 부부의 마음이었다. 그들의 환대는 단순한 식사가 아니었다. 마치 “우리의 새 출발을 함께 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따뜻한 저녁으로 건네는 것 같았다.
홍집사님 부부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고성 땅으로 귀농을 선택했다. 익숙한 도시를 떠나 낯선 시골에서 다시 씨를 뿌리고 흙을 만지며 계절을 살아가기로 한 것이다. 처음엔 두렵고 낯설었을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바람 한 줄기에도 감사할 줄 알고, 땅 한 줌에도 의미를 찾을 줄 아는 사람들이 되었다. 그들의 눈빛에는 불안보다 설렘이, 걱정보다 소망이 더 짙게 깃들어 있었다.
그날 저녁, 산을 내려오며 올려다본 하늘에는 별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마치 하나님이 새 집 위에 복을 가득히 부어주는 듯했다. 우리는 모두 마음속으로 조용히 기도했다. 이 집이 세워진 것이 단지 사람의 손 때문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길 때문임을, 이 부부의 새로운 삶이 축복의 길로 이어지기를, 그리고 이 집이 앞으로 웃음과 기도, 사랑이 머무는 작은 성전이 되기를 말이다.
그렇게 무지돌이 마을의 한 가을날에, 한 채의 집이 세워졌다. 아니, 어쩌면 집보다 더 크고 따뜻한 무언가가 함께 세워진 날이었다. 그것은 돌처럼 단단하고, 바람처럼 부드러운 공동체의 마음이었다. 그리고 그 마음 한가운데에는 홍집사님 부부의 따뜻한 손길과 새로운 꿈이 조용히 자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