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하늘에 달이 있을 때 나는 마음이 풍요롭다. 보름달이든 반달이든 가리지 않고 한참씩 바라보곤 한다. 오늘은 오랜만에 보는그믐달이다.
초록이들에게 양해를 구해야 했다. 아직은 엊그제 몰려온 이상 한파가 물러가지 않은 새벽이다. 문을 열자 한기가 확 몰려들었다.
"잠시만, 아주 잠시만 참아주렴. 미안해."
새해 첫 그믐달이다. 카메라를 들고 그믐달을 바라보았다. 단 두 번만에 찍어서 다행이다. 오늘 이 달이 한 달 전 그 달은 아닐지라도 어떤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한다는 건 암흑의 땅에 뿌린 씨앗도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울 수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어제저녁 남편이 말했다.
'삶이 너무 단출하다."
코로나 19 이후 단조롭다 못해 꽉 막힌 일상에 대한 남편의 첫 소회다. 스스로 봉쇄를 택한 나와는 달리 남편은 이삼일에 한 번씩은 외출을 하는데도 마음대로 활동하지 못함이 힘든 모양이다. 그럼에도 남자는 결코 힘든 내색을 하면 안 되는 줄 아는 세대를 살아온 남편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는 건 갇혀 지내는 듯한 요즘의 상황이 참기 힘들 정도로 숨이 막힌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시 한 마디가 이어졌다.
"사람들과 어울려 살 날이 많이 남은 것도 아닌데 코로나가 너무 오래 가네."
열흘 후면 코로나 19로 시끄러워지기 시작한 지 딱 1년이 된다. 남편은 가을부터 몇 개월 동안 교육을 받으러 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그 교육조차도 거리두기 단계에 따라 30명 정원을 15명씩 나눠 교육을 진행했다. 결국 하루 쉬거나 오전 또는 오후를 쉬었으니 성에 차지 않았을 것이다.
5인 이상 모임조차 금하게 되면서 사랑하는 딸들 얼굴 보기도 어렵게 되었다. 다음 달부터 백신도 보급된다는 소식부터 여러 희망적인 이야기들이 들리고 있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지금까지 지켜본 바에 따르면 희망이 희망의 줄기를 제대로 뻗지 못하고 자주 수렁으로 빠져들곤 했다. 급기야 5인 이상 모임을 강제로 금하는 상황까지 왔다. 지금 상황이 조금 나아질 기미가 보일 뿐 장밋빛이라고만 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러다가 백신에 문제가 생기지 말라는 법도 없으니 겉으로 내색은 않지만 하루하루가 흔들리는 것 같은 삶이다.
딸들이 '보고 싶어' 톡을 날릴 적마다 나는 딸들과 함께 있다는 느낌 외에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디에 있든 어떤 일을 하든 사람에게 이로운 일을 하며 건강하게 잘 살며 만족할 수 있으면 된다, 거기서 행복을 느낀다면 최상이다. 이렇게 생각하며 나는 늘 딸들이 나와 함께 있다고 믿어왔다. 하지만 남편은 나와는 달랐었나 보다. 얼굴 보면서 이야기 나누고 식사도 하고 좋다는 데 다녀도 와야 함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런 단출함과 단조로움을 모두 갖춘 듯 보이는 한 쌍을 보았다. 내가 공원을 네 바퀴 도는 동안 그들의 뒷모습을 두 번 보았다. 외투에 달린 모자로 머리를 가리고 마스크를 썼으니 어떤 사람들인지 알 수는 없었다. 다만 키 차이와 옷의 모습으로 미루어 부부로 보이는 남녀였다. 걸음의 속도는 느렸고 두 사람이 주고받는 듯한 두런거림도 없었다. 여자로 보이는 키가 작은 이는 남자로 보이는 이의 팔을 꼭 잡고 있었다. 그렇게 두 바퀴를 돌고 그들은 상가 쪽으로 사라졌다.
약간 구부정한 그들의 뒷모습은 다른 사람들 눈에 비칠 남편과 나의 어느 날의 모습이기도 했다.
단출함과 단조로움 사이에서 남편을 바라본다. 문득 코로나가 시작된 이후 특히 이 몇 개월 간은 세상에 남편과 나 둘이 똑 떨어져 지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까운 이웃과의 차 한 잔 나누기조차 꺼려지게 하는 2020년이었다. 까짓 코로나 19가 가면 얼마나 가겠어? 사스에 메르스도 겪어봤지만 우리 가까이엔 접근도 하지 않았잖아. 길어봤자 두어 달이면 다 뿌리를 뽑곤 했지. 하지만 그동안의 바이러스 뿌리 뽑기는 행운이었나 보다.
무인도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로빈슨 크루소 따라잡기의 주인공 '노빈손(뜨인돌)'이 스쳐갔다. 내가 처음 자급자족을 꿈꾸었을 때의 자급자족이란 요즘 같은 단절이 아니었다. 단출하고 단조로움만으로 뭉쳐 있더라도 바라보는 세상은 평화롭기를 바라는 자급자족이었다. 무채색 같은 단조로움일지라도 단조로움이 주는 맛을 좁쌀알 만큼은 알 것 같은 어느 시기였다. 수도자가 될 팔자가 세상을 거닐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었다.
어둠 속을 떠 가는 그믐달은 그러나 희망이 가까웠음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하다. 어둠 가운데 뜬 저 이지러진 달이 아주 사라지더라도 아우성 칠 이유가 없다. 소리 없이 어둠이 가시기를 기다리면 된다. 흙탕물이 맑아지기 위해서는 기다리는 일 외엔 없다시던 신부님 말씀을 또 떠올렸다. 암흑 뒤에는 새로운 빛이 자라고 있음을 안다. 오래전부터 그래 왔다. 죽은 듯 얼어붙은 땅에서 고물고물 새순이 올라오듯 말이다.
'두 손을 약간 오므려 합장을 해 보세요. 오른손 모양은 초승달. 왼손 모양은 그믐달입니다.' 지학 선생님께서 알려주신 초승달과 그믐들의 구별법이다. 이후 초승달과 그믐달을 헷갈리지 않게 되었다. 나는 생각했다. 어둠 속에서 나온 초승달은 점점 부풀어 한없이 자랄 수도 있었다. 그믐달이 다가와 감싸주지 않았다면 달은 둥근 모양을 유지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처음은 끝이라는 의지처가 있어 사물은 완성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아닐까.
단조롭지만 무지개를 볼 수 있고, 단절이 아닌 단란의 날을 맞아 단출하지만 평화 가득할 날을 기다린다. 저 달이 완전히 어둠에 들면 나는 다시 어둠 속에서 침묵하리라. 어둠을 먹으며 침묵이 영글고 기다림도 영글다 보면 새로운 초승달이 오른손처럼 떠오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