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단, 예물 정하기 ②
드라마를 보면 (보통 부잣집으로 묘사되는) 남자 집안에서 (보통 가난한 집으로 설정된) 여자 집안에 준비해야 할 예단 목록을 적어서 주면서 결혼 준비에 위기가 발생한다. 명품 가방, 밍크코트, 보석 등 그 종류도 다양하다. 그 정도 유난은 떨어야 갈등이 생기는 줄 알았다.
하지만 양가에서 서로 상식적인 주장을 하더라도 문제가 생길 수 있는 것이 결혼 준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나의 부모님께선 현금을 주고받길 원하셨다. 언제부터 인지는 모르겠으나, 신부 측에서 일일이 예단용 물건을 준비하는 대신 얼마간의 현금을 신랑 쪽에 보내고 신랑 측 또한 현금을 신부 쪽에 보냄으로써 서로 원하는 혼수를 장만하는 문화가 어느 정도 자리 잡은 모양이다. 어머니 주변 지인들도 다들 그러게 간소하고 ‘합리적’으로 했단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은 도대체 왜 이게 ‘합리적’ 이냐는 것이다. 물론 이것저것 물건을 고르는 수고도 덜고, 기껏 고른 선물이 상대방의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다는 부담도 없앨 수 있으는 장점은 있겠다. 다만, 어차피 돌려줄 걸 왜 받는지 납득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통상 신부 측에서 신랑 측에 보낸 액수의 절반을 다시 신부에게 선물한다는데, 그럴 거면 그냥 처음부터 절반만 보내면 되는 건 아닌지.
어쨌든 선물 받을 사람, 즉 부모님이 원하시니 그대로 해드리려고 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가족 간에 생일선물이나 명절 선물도 현찰로 주고받는 세상에 결혼이라고 뭐 다를까 싶기도 했다. 문제는 나와 같은 의문을 여자친구와 그녀의 부모님도 품고 있었다는 것이다. 내가 ‘현금 예단’ 이야기를 했더니 깜짝 놀라며 이렇게 말한다.
“어? 우리 엄마 벌써부터 이것저것 사러 다니시는 것 같던데? 사돈댁에 선물 보낸다고.”
‘아뿔싸. 진작 얘기를 꺼냈어야 하나. 아니지, 이제 막 그 난리 친 끝에 신혼집 계약 끝낸 마당에 그럴 정신이 어딨 어.’ 후회스러움과 자기변명이 동시에 오가는 내 머릿속은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다음은 상견례 날짜를 고르던 때와 비슷한 과정을 겪었다. 바로 양가 부모님이 조금씩 양보하도록 설득하는 일 말이다. 그러나 이 또한 쉽지 않았다. 애초에 선물을 주고받는 일이 왜 서로 양보를 해야 할 일일까. 더욱이 여자친구는 자신의 부모님을 설득할 마음이 없었다.
“내가 왜 우리 엄마 아빠를 설득해야 하는데? 예단도 결국엔 선물이잖아. 주는 사람이 마음을 담아 주는 게 중요하지. 정해진 공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받는 사람이 별 필요 없다고 느끼는 게 과연 좋은 선물일까? 지금 준비하신다는 이불이니 수저니 하는 것들, 형이랑 형수 결혼할 때 받은 거 아직 한번 써보지도 못하고 있대.”
지극히 상식적인 여자친구의 말에 나 또한 상식적인 수준의 대답을 했지만 둘 다 어조는 묘하게 격앙되어 있었다. 실제로 결혼 준비를 하다 보니 이상하게 여자친구보다 부모님의 편을 들게 되는 일이 더 많아지곤 했다. 어르신들을 설득하는 것보다 우리가 양보하는 게 더 쉽다는 이유도 있지만, 아무래도 30여 년을 함께 살며 나도 모르게 부모님과 비슷한 가치관이 정립됐기 때문에 매번 여자친구의 의견이 다소 파격적이고 생소해 보였던 것 같다(물론 당시엔 눈앞의 일을 해결하기도 급급했기에 이런 생각을 할 여유조차 없었다).
하지만 부모님 편을 드는 내 모습이 그녀에겐 심히 거슬렸음이 분명하다.
“내가 이런 말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우리나라 결혼제도는 정말 불공정하기 짝이 없어.”
그녀의 말투와 표정으로 미루어, 나는 이번엔 정말 큰일이 났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