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느리지만 가끔은 여행자가 되고 싶다_ 2. 사람 이야기가 넘치는 곳
“칼질 좀 하러 갈까?”
남편이 시부모님과 나에게 칼질(?) 좀 하러 가자고 제안했다. 나야 외식은 늘 찬성이었고, 돈가스와 파스타 같은 양식을 좋아하시는 시아버지도 좋아하셨다. 밖에 나가기를 다소 귀찮아하시는 시어머니를 겨우 모시고 경양식 집으로 향했다. 몇 개월 전, 남편이 자주 찾던 맛집 블로그에서 분위기 좋은 경양식 집을 알았다면서 언젠가 꼭 한 번 가자고 얘기를 해 왔다. 블로그 사진을 보니, 1990년대에서 2000년대 분위기가 물신 풍겼다. 식전 빵과 스프, 메인코스, 볶음밥, 그리고 후식까지 나오는 경양식 코스가 제법 잘 구성된 곳이었다.
경양식 집은 연식이 오래되어 보이는 건물 4층에 위치해 있었고, 평소 솔직하게 말을 툭툭 내던지시는 시어머니께서는 “건물이 왜 이렇게 후지노.”라고 하셨다. 요즘 레트로가 유행이라서 젊은 사람들이 이런 곳을 찾는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뭐 내가 가자고 한 것도 아니고 남편이 가자고 했으니 비겁한 변명(?) 따위 하지 않았다. 어쨌든 난 좋았으니까. 오래된 건물에 오래된 엘리베이터였지만, 그 나름대로 분위기가 있었고 왠지 어린 시절로 시간 여행을 하러 가는 것 같았다. 무늬가 화려한 소파에 앉아 경양식 돈가스 네 개를 주문하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통창 밖으로 통영대교가 멋들어지게 서 있었고, 그 아래로 작은 배들이 떠 다녔다. 아이는 통통배가 귀여운지 배를 구경하기 바빴고, 나와 남편은 통영대교와 드넓게 펼쳐진 바다를 멍 하니 바라보았다.
“예전에 근처에서 회 먹은 거 기억나나?”
“누구랑 먹었노. 나는 기억 안 나는데.”
조금 전 약간 후진(?) 건물에 실망하시던 시어머니께서 옛 동네와 이야기를 신나게 꺼내놓으셨다. 그러는 사이 식전 스프와 빵, 샐러드, 오렌지 주스가 먼저 나왔다. 스프가 다소 밍밍한 맛있었지만 예전에는 스프가 물에 탄 맛있었다면서 후루룩 먹었다. 아이는 오렌지 주스가 맛있는지 벌컥벌컥 마셔댔다. 메인 요리인 경양식 돈가스가 곧이어 나왔다. 가니쉬로 케첩과 마요네즈가 섞인 양배추 샐러드, 마카로니 샐러드, 완두콩 통조림, 옥수수 통조림, 과일 통조림이 나왔다. 여기에 고슬고슬한 볶음밥도 나왔다. 솔직히 맛은 요즘 이름난 돈가스집이 훨씬 나았지만, 어린 시절에 맛보았던 기억이 떠올라 나쁘진 않았다. 우린 대학생 시절 경양식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남편의 어린 시절 이야기와 90년대 카페에서 먹었던 파르페 이야기, 배를 타면서 수없이 파스타와 돈가스를 먹었다는 시아버지의 옛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꺼냈다. 맛있는 이야기를 하면서 돈가스를 먹다보니 후식으로 아이스크림이 나왔다. 고급스러운 맛은 아니었지만 느끼함 가득한 입안을 상쾌하게 메우기 좋았다. 사실 통영대교는 야경이 매력적이라 저녁에 오려고 했는데, 낮의 통영대교도 나름 소박한 멋이 느껴졌다. 대신 남편과 아이 셋이서 따로 저녁에 와서 땅콩 안주에 맥주 한 잔 마시자고 약속했다.
음식점을 나와 잠깐 근처를 산책하고 차를 타고 가는데, 우연히 해저터널을 지나게 되어 잠깐 내렸다. 해저터널은 신혼 때 남편과 둘이서 온 적이 있다. 당시 남편이 아시아 최초의 해저터널이라면서 어깨에 잔뜩 힘을 주며 이야기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왜 그렇게 어깨에 힘을 주었냐고 물으니, 사실 자기도 처음 와봤는데 나에게 좋은 걸 알려주고 싶은 마음에 그랬다고 털어놓았다. 해저터널은 통영대교와 충무교와 함께 통영 당동과 미수동을 잇는 길로, 1932년에 만들어졌다. 자체가 예쁘고 아름다운 것은 아니지만, 약 90년 전에 해저 13m 터널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참 대단하게 느껴졌다. 아직 30대 중반이나, 나이가 들면 들수록 외적인 아름다움보다 내적인 의미와 가치가 더욱 중요하다는 걸 깨닫고 있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그것이 가진 내면을 들여다보는 게 중요하며, 그때 비로소 진짜 이야기와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는 걸 한해 한해를 보내면서 느끼고 있다.
블로그에서 시작해 경양식 돈가스, 통영대교, 그리고 해저터널까지 이어졌던 반나절이 참 좋았다. 시부모님의 젊은 시절 이야기도 듣고, 우리의 어린 시절도 추억하고, 둘만의 데이트 기억도 떠올렸기 때문이다. 음식 맛보다 마음이 풍성해지는 점심 한 끼였다. 조만간 통영대교 야경을 느낄 날을 기대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