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살린 '그림책 글쓰기'

by 핀다


3개월이 지난 후, 나는 갑자기 많이 슬펐고, 많이 화가 났다. 하루 종일 불에 타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화상을 입어 벌게져도, 내 안에는 다음 날 또 불에 탈 것이 남아있었다. 또 태웠다. 말랐던 눈물도 스프링클러처럼 터졌다. 아무렇지도 않게 텅 비었던 몸속에 자꾸 뭔가 들어차서 넘치고 또 넘쳐, 태우기를 반복했다.


분노도 슬픔도 에너지였는지 나는 오히려 외출할 수 있게 되었다. 나의 상황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곳, 기껏해야 걸어서 3분 거리의 그림책방에 갔다. 그곳의 책방 주인은 진중하고 단단한 속내와는 달리 뛰어난 유머감각과 가벼운 웃음소리로 다정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주는 사람이다. 책을 보러 갔는지, 책방 주인과 이야기를 하다가 한번 웃고 싶어서 갔는지 모르겠다. 책방 주인은 오랜만이라며 그림책 속에서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래, 나한테 그림책이 있었지.’ 낭독 모임에서 다른 사람이 읽어주는 그림책을 가만히 들었다. 누군가 내 이야기를 물으면 한 마디 대답을 하기도 전에 눈물이 먼저 앞을 가렸었지만 그림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입도 쉽게 열렸다. 그런데 그날따라 이상하게도 한쪽 구석이 불편했다. 나중에서야 알았다. 나의 그림자가 고개를 들었던 것이었다. 그림책을 보면 멈칫하거나, 눈물이 나거나, 화가 나거나, 불편할 때가 있다. 그림책이 내 안의 그림자에 등불을 비추기 때문이다. 내 안에 있는지도 몰랐던 그림자, 나도 모르게 발로 지근지근 밟았거나 상자 속에 구겨 넣은 그림자를 발견한다. 그림책을 읽었다고 그림자자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STICHES> DAVID SMALL / NORTON

David small은 그의 작품 '바늘땀'을 통해 자신의 아픔을 스스로 치유하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는 어려서부터 가정에서 받은 심리적 학대로 하루하루를 외롭게 버틴다. 목소리까지 잃게 만든 14살 때의 수술은 목부위에 흉측한 수술자국을 남긴다. 성인이 되고 나서 지금의 부인인 사라 스튜어트와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는 도중, 목에 덩어리같은 것이 부풀어오르는 것을 느낀다. 망상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가려고 했지만 같이 식사하던 사라 스튜어트의 기겁한 얼굴을 보고 놀란다. 암덩어리는 몸에서 떼냈지만 마음의 상처는 그대로 남았던 것이다. 50살이 넘어서도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던 그는 억압된 분노와 불안으로 얼룩진 자신의 과거를 직면하기로 결심하고 ‘바늘땀’이라는 그래픽 노블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토해낸다. 목의 혹은 신기하게도 사라진다. 그림자는 그림자의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더 이상 비뚤어진 모습으로 일상을 무너뜨리지 않는다. 그 방법으로 글쓰기는 탁월한 효과를 발휘한다.


치유는 밝은 요소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빛과 어두움이 서로 닿기 시작하는 곳에서 기적이 일어난다.
-로버트 존슨, ‘당신의 그림자가 울고 있다.’


나도 전문가가 추천해준 대로 글쓰기를 해 보려고 시도해 봤지만 단 한 문장도 쓸 수가 없었다. 내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저 글자를 쓰기로 했다. ‘오늘은 화요일이다. 새벽 6시다.’ 이런 식이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시커멓고 덩어리 진 쓰레기들이 울컥울컥 쏟아져 나왔다. ‘협박, 끝, 무시, 멸시, 공포, 불안, 추락, 실패’로 가득한 글은 도저히 다시 읽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쓰레기를 정신없이 쏟아내던 내 글 속에 그림책 이야기가 숨어들었다. 놀랍게도 그림책에 관한 이야기는 희미하게나마 빛이 났다. 그렇게 한참을 '아무말대잔치'를 열어 글자를 쓰다가, 그림책 이야기를 쓰다가, 드디어 나의 이야기를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림책에서 고개를 들었던 그림자들이 글 속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때로는 당황하고, 때로는 눈이 질끈 감겨 도망가고 싶기도 했다. 난 사회 부적응자도 지나치게 예민한 성격도 아니다. 가족들, 친구들, 지인들에게서 종종 위로도 받고 응원도 받고 행복해한다. 하지만 나를 치유하고 다시 세우는 세심한 작업은 나의 밑바닥까지 내려가야 하기 때문에 반드시 은밀한 혼자만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나는 튀어나온 그림자들이 문장 사이사이를 춤을 추다 내게 꼭 안길 때까지 그림책을 읽고 글을 썼다.


조각보를 만들다. 완전해지다.

나는 그림자 속에 갇혀 흩어져버렸던 나를 모아 바느질을 시작했다. 다섯 살의 아이, 열두 살의 소녀, 열여덟의 아가씨, 스물셋의 여자, 서른둘의 엄마. 그림자를 한 조각씩 주울 때마다 오열했다. 자투리들이 연결되어 아름다운 조각보가 완성되었을 때, 비로소 나는 나를 다시 마주할 수 있었다. 다시 꿈꾸고, 사랑할 수 있었다. 완벽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 모습 그대로 완전했다. 당신도 당신만의 조각보를 완성하기를 소망하며, 나의 작지만 소중한 조각보 이야기를 전한다.



<HORTENSE and the SHADOW> NATALIA &LAUREN O'HARA / PUFFIN

호텐스와 그림자

주인공 호텐스는 어딜 가나 자기를 따라다니는 그림자가 끔찍이도 싫다. 급기야 그림자를 밖에 두고 문을 쾅 닫아 그림자를 잘라낸다. 그러던 어느 날 호텐스는 숲 속에서 내려온 괴한들을 만나는데, 뜻밖에도 그렇게 싫어했던 그림자가 호텐스를 구한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을 뿐 아니라 나 스스로도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어두운 그림자를 누구나 가지고 있다. 하지만 결코 그림자는 떼어 내거나 없앨 수 없다. 그림자는 우리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다만, 희망이 있다면 그림자가 오히려 우리를 구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THE DARK> LEMONY SNICKET, JON KLASSEN / LB

어둠이 찾아왔어

어둠을 무서워하던 소년이 어느 날 밤 용감하게 지하실까지 내려가 어둠을 만나고, 어둠이 소년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던 작지만 환하게 빛나는 전구를 발견한다. 어둠은 매일 밤 소년과 함께 있었지만 더 이상 소년은 어둠 때문에 괴롭지 않았다. 그림책 글쓰기를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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