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잃지 않을게
단지 엄마로만 살지 않겠다는 다짐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엄마와의 숱한 다툼 속에 들어왔던 저 말. 엄마의 슬픔과 배신감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말이었지만 나는 엄마의 말에 공감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좀 더 엄마를 위해 살았다면 내가 부담감에 짓눌려 살진 않았을 텐데 싶어서.
엄마의 희생이 당연하게 요구되고 그런 요구에 또 당연하다는 듯 응당 그렇게 살아온 엄마의 삶이 나는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을까. 나를 잃어버리고 사는 삶이 결코 행복할 수는 없는 법이다.
숭고한 정신으로 표현되기도 하는 희생이 부담으로만 느껴지는 건 그로 인한 불행을 피부로 느끼며 살았기 때문이다. 그 불행을 나도 짊어져야 했기 때문에. 자식을 위해 이혼하지 못했고, 자식을 위해 입고 싶은 옷도 사 입지 못했고, 자식을 위해 뒷바라지하느라 빚까지 져야 했던 우리 부모님. 그 힘든 삶을 곁에서 고스란히 보고 자라야 했던 나도 너무 힘이 들었다. 부모님의 행복이 나에게 달린 것 같아서. 우리는 결코 독립해서 살 수 없을 것 같아서. 부모님의 불행이 나의 책임인 것 같아서.
20대 어느 날, 친구와 술자리를 가진 날, 올라온 술기운에 기대 울면서 친구에게 털어놓았던 그 말.
"내가 엄마한테 잘해야 해."
하지만 나는 잘 해내지 못했다. 나도 나를 잃으며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 상황에 엄마의 삶까지 돌볼 여유가 없었다. 오히려 스스로 행복해지지 못하는 엄마에 대한 원망만 더해졌을 뿐이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원망은 더 깊어졌다.
나이가 더해갈수록 나는 내 삶을 살지 못하는 내가 더 싫어졌고, 점점 약해져 내게 기대고 싶은 엄마도 더 미워졌다. 그렇게 나도 나를 잃고 살았고, 엄마도 엄마 자신을 잃고 살았다.
내 삶을 간신히 살기 시작한 후로 나는 독립을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의 독립을 엄마는 반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옳은 길로 나아가는 모습에 자랑스러워 하긴 했지만 그건 엄마 곁에 있어야만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인천 집에서 버스로만 네 시간 걸리는 먼 거리의 대학을 다니게 된 나를 자랑스러워하면서도 매번 기숙사로 향하는 나를 보며 엄마는 울었다. 그 우는 모습을 보며 떠나는 내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무거운 짐을 마음에 가득 쌓아놓고는 다시 인천으로 돌아가는 날까지 매일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미주알고주알 내 하루를 전했다.
진주로 오고 며칠 정도는 마음이 불편했지만 그 시간이 지나면 자유로워졌다.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마음껏 할 수 있었고, 매여 있지 않다는 자유와 책임이 자존감을 한층 더 높여주었다.
인천 집에 꼭 가지 않아도 된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를 기다리는 엄마의 마음을 외면할 수 있을 만큼 나는 모질지 못했다. 속박과 자유를 넘나들며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결혼할 때부터 엄마는 탐탁지 않아했는데 그 가장 큰 이유는 인천 집에서 너무 먼 거리에 있는 진주에 보금자리를 잡겠다는 나의 결심 때문이었다. 교대 졸업하면 인천에서 임용시험을 치르고 엄마 곁에서 교사생활을 하길 기대했는데 바로 엄마 곁을 떠나겠다니 그게 용납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준비가 되었는데 엄마는 나로부터 독립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엄마는 상실감을 느끼고 있었고 그 감정은 내가 아이를 갖고 더 심화되었다.
엄마에겐 시간이 필요했다. 엄마는 그 과정이 고통스러웠는지 종종 내게 그 감정을 표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엄마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도 휘몰아치는 엄마에 대한 감정 때문에 힘든 차였는데 엄마의 힘듦을 받아내기가 버거웠다. 그래서 모른 척했다. 그 과정에서 언성이 높아지기도 했고, 연락이 두절되기도 했다.
몇 번의 이런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엄마와 나 사이의 적당한 거리를 찾아내었다. 엄마도 이제는 그 거리가 어느 정도 익숙해졌는 것처럼 보였다. 엄마의 현재를 모두 알지 못해도 불안하지 않았고, 엄마도 내게 모든 걸 다 묻지 않았다. '이제야 나는 정서적으로 독립을 시작하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금 하는 모든 일들은 엄마인 나로서도 잘 살기 위함이지만 나, 이윤희로서도 잘 살기 위함이다. 나를 잃고 사는 일이 없도록, 나를 지켜 내 아이를 지키기 위함이다.
엄마로서의 희생을 얕잡아보고 싶지 않다. 단지 나는 그것이 내 아이에게 짐이 될 수 있음을, 나를 불행하게 할 수 있는 일임을 인지하며 살고 싶을 뿐이다.
그래서 내 시간을 가지려 노력하고, 나의 철학을 가지려 애쓰고, 아이를 독립적으로 보려 의식한다. 나의 행복을 위해서, 아이의 행복을 위해서.
아이는 부모의 모습을 보며 자란다. 내가 나를 잃지 않고 살아야 내 아이도 자신을 잃지 않고 살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공부를 한다.
내 눈이 흐려지지 않기 위해서, 내 중심을 잡기 위해서, 단지 엄마로만 살지 않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