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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Jun 12. 2024

어제의 하늘보다 오늘의 하늘이 9

246


246.


 -동양의 멋진 친구, 이 말을 하고 싶었어. 당신이 바로 나니까.


 당. 신. 이. 바. 로. 나. 니. 까.


 사라 발렌샤 얀시엔이 오래전에 나에게 했던 말이다. 나는 와인 잔을 손으로 들어 올리다가 고개를 든다. 늙은 소피는 사라 발렌샤 얀시엔의 얼굴을 하고 숨 막히는 가슴골을 내보인다. 사라 발렌샤 얀시엔의 얼굴로 바뀐 소피의 얼굴은 흐릿하게 막이 껴 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아내를 찾는다. 아내가 내 곁으로 달려왔지만 아내의 얼굴도 지우개로 뭉개 놓은 그림처럼 알아볼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라 발렌샤 얀시엔은 한 손에는 한우가 담긴 접시를 들고 나에게 와서 접시를 보여주었다. 접시에는 어린 시절 철길에서 분쇄되어 흩어져 버린 아이들의 살점들이 놓여 있었다.


 -당신이 바로 나니까.


 나는 소리를 질렀다. “아니야!”


 -내가 당신이니까요.




 눈을 떴다. 의사가 나가고 마동은 또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꿈을 꾸면 사라 발렌샤 얀시엔이 보였지만 얼굴형상은 알아보기 힘들었다. 잠에서 깨어나도 성몽 뒤에 밀려드는 현실과 비현실의 감각이 무뎌지는 현상 같았다. 마동은 눈두덩을 두 손가락으로 야무지게 비볐다. 눈꺼풀에 화풀이라도 하듯 억척스럽게 손가락을 돌렸다.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사라 발렌샤 얀시엔이 꿈에 나타나고 나면 현실에서는 초조함이 밀려들었다. 사라 발렌샤 얀시엔의 얼굴을 떠올리면 거짓말처럼 는개의 얼굴이 그 위에 덧입혀져 나타났기 때문에 초조함은 더 크게 들었다.


 어째서 아무런 상관도 없는 는개가 사라 발렌샤 얀시엔의 얼굴에 겹쳐 나타나는 것일까. 는개 때문인지 사라 발렌샤 얀시엔의 얼굴은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먼 기억 속의 기찻길 위에서 희미한 태양빛을 받으며 옆에 누워서 나의 손을 잡아 주며 웃어 주었던 그녀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 것처럼. 어린 시절 병원 복도에서 내 손을 잡고 그 길을 같이 걷던 따뜻했던 손의 주인공이 떠오르지 않는 것처럼.


 마동은 병원을 나왔다. 휴대전화가 없어서 회사에 연락을 할 수 없었고(하기 싫었다) 누군가가 어디서 연락을 했을지도 알지 못했다. 분명 회사에서는 연락도 없이 결근을 해 버린 마동에게 많은 연락을 했을 것이다. 아마 소피도 트위터로 메시지를 넣었을 것이다. 소피와의 소통은 오로지 트위터로 하기 때문에 디렉트 메시지로 연락이 몇 개나 와 있을 것이다. 아니면 이메일이 도착했을지도 모른다. 소피는 이제 곧 아시아 프로모션 투어로 한국에 올 예정이다. 소피가 한국에 오면 노란빛이 감도는 분위기가 예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단맛이 가득한 조각케이크를 먹으며 당분 따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소피는 한국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고 한국인에 대한 나쁜 기억은 선물상자만큼 크게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소피는 마동과 인터넷네트워크를 통해 한국에 대해서 알고 싶어 했다. 비록 하루 동안이지만 마동은 소피에게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처럼 평범하지만 좋은 기억을 남겨주고 싶었다. 언젠가 소피는 자신의 매니저가 한국산 자동차를 몰고 다닌다고 했다. 가격이 저렴하고 여러 가지 전자 작동 장치가 촘촘하고 아주 편리하다는 이야기를 마동에게 했다. 소피는 미국 드라마 로스트를 즐겨 본다고 했고 그 속의 한국배우 김윤진이 신비로운 배우라고 말했다.


 하지만 소피를 제대로 잘 만날 수 있을까.


 밖으로 나온 마동은 혼자 긴팔의 티셔츠를 입고 있다는 걸 알았다. 티셔츠의 촉감이 새끼고양이 털처럼 부드럽고 가우디의 작품처럼 고급스러웠다. 아마 고가의 티셔츠 같았다. 옥상의 난간으로 올랐을 때 입었던 옷은 전부 재가 되어 버렸다. 실제로 연소가 되어 버렸다. 병원의 작은 방에서 잠들 때 이 옷을 의사가 입혔을 것이다. 소피의 가족과 보내는 꿈을 꾸고 일어났을 때 발기해 있었다. 페니스라는 핏덩어리는 때때로 머리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반응하는 살아있는 개체였다. 아마도 병실에 데리고 왔을 때에도 발기했을 것이다. 이 옷은 의사나 분홍간호사가 의사의 옷을 마동에게 입힌 것이다. 왜인지 의사가 자신의 발가벗은 몸을 봤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창피함이 몰려왔다. 발가벗고 있을 때 페니스가 천장을 보고 서 있었다는 생각이 드니 더욱 부끄러웠다.


 발가벗은 나를 업고 병원까지 어떻게 왔을까. 마른 몸이라고 해도 성인이고 몸이 축 늘어진 인간은 상당히 무게가 나갈 텐데.


 그런 자신의 몸을 업고 온 의사를 생각하니 새삼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의사는 일반론에서 벗어난 인물이다. 확신이 들었다. 어떤 것도 확실한 것이 없었는데 이것 하나는 확실했다. 더불어 창피함은 더욱 커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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