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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HGXING May 11. 2024

사춘기 딸을 둔 아빠들 모두 무탈하십니까.

[대만 소소한 일상]

일요일 밤 사달이 났습니다.


잠들 준비를 하고 있는데 아내와 딸이 또 날카롭게 부딪치고 있네요.


머 대수롭지 않습니다. 종종 있는 일이니까요. 


서로 지지 않습니다. 엄마와 딸인데 서로 지지 않는다니 어색한가요? 엄마의 완승이 당연한데 아니어서요? 아니면 사춘기 딸내미와 대등한 엄마가 대단해서요?


옆에서 지켜보는 남편, 아빠 입장에서는 살얼음판입니다. 누구 편들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런 분위기도 싫습니다. 내심 이렇습니다. 아내의 화내는 모습을 보면 원칙에 맞게 아이를 다루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고, 반면 아이는 자기가 분명 약속을 지키지 않아, 핸드폰 보며 시간을 허투루 보내서 이렇게 사달이 났는데 너무 당당한 것 같고요. 


서로 노려보는 눈빛이 쨍하고 부딪치는데 허공에 스타워즈 광선 검이 난무하는 것 같습니다. 신기하게 둘 다 안 져요. 키는 이미 딸아이가 더 크네요.


이런다고 아내와 딸 사이가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는 건 아닙니다. 그게 신기합니다. 한 달은 안볼 것처럼 으르렁 대는 ‘극한 대립’을 했는데도 그 다음날 딸아이는 또 엄마한테 앵깁니다. 그 다음날 내가 마루에서 자겠다고 하니 엄마 옆 침대로 기어들어갑니다. 두 사람 관계의 소위 회복탄력성에 내심 놀라곤 합니다. 


아이가 어릴 때부터, 저와 아내는 암묵적으로 이렇게 하자고 작정했습니다. 즉 저는 ‘천사’ 역할, 아내는 ‘악마’ 역할. 와이프는 아이에게 엄하게 화도 내고 잔소리도 하지만 저는 그저 아이가 원하는 것 다 들어주고 웬만하면 아이 짜증도 다 받아주기로. 당근과 채찍 역할을 나눈 셈이지요. 


이렇게 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아내 지론이죠. 엄마와 딸의 관계는 아무리 지지고 볶아도 회복될 수 있지만 아빠와 딸의 관계는 한번 틀어지면 평생 안 볼 수도 있다나요. 그래서 이렇게 하자 했던 겁니다. 


그랬는데, 그랬는데요. 아주 가끔이긴 하지만 요즘엔 저도 아이한테 화를 내는 일이 생깁니다. 이날 일요일 밤이 그랬습니다. 


딸아이가 지금 중3인데, 이제 올해 8월부터면 국제학교니까 고등학생이 됩니다. 그러면서 여름에 시험을 하나 봐야 하는데 그 시험이 조금은 중요한 시험인가 봅니다. 아내는 이 때문에 올 초부터 아이를 으르고 달래며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날 그래서 일요일이지만 아이 공부시킨다고 부산합니다. 아이가 집에서 집중 안 된다고 나가자 해서 겸사겸사 함께 도서관 가기로 했습니다. 집근처 양명산 올라가는 길에 타이베이 시립 도서관 텐무(天母) 분관이 있습니다. 갔지요. 집에 혼자 있는 것보다는 아이랑 아내랑 함께 시간 보내고 싶어 따라 나섰습니다. 도서관 가는 걸 좋아하기도 하구요. 저도 머 할 게 있기도 했고요.


타이베이 시립 도서관 텐무(天母) 분관


도착해서 자리 잡고 노트북 꺼내고 책도 책상 위에 올려놓습니다. 시설이 약간은 낡았지만 머 대수입니까. 다들 조용히 공부하고 있네요. 예전 고등학생 때 종종 가던 서대문의 419도서관 같은 분위기에요. 


노트북 전원을 켜고 비번 입력하는데, 아내가 가잡니다. 어딜? 다른 도서관. 에어컨도 잘 안 나오고 좀 어두워서 딸아이가 좀 투정하는 것 같습니다. 아내도 내심 다른 도서관에 가고 싶어 하고요. 머 어쩔 수 있나요. 저야 그냥 따라 나선 처지인데, 가야지요.


다른 도서관은 스린 지하철역 장개석 총통 관저 근처에 있는 타이베이 시립 리커영(李科永) 기념 도서관입니다. 비도 오기에 택시 탔습니다. 10여분 걸립니다. 


스린쪽 도서관은 양명산쪽 도서관에 비해 쾌적합니다. 열람실 공간도 넉넉하네요. 열공하는 대만 중고생들이 꽤나 많습니다. 칸막이 없는 테이블을 찾아 아내와 딸아이가 앉고 저는 그 옆 테이블에 자리합니다.


시간 빠르네요. 온지 1시간 됐나 싶은데 벌써 점심시간입니다. 마땅히 먹을 식당이 없어서 근처 모스버거에서 햄버거를 먹었습니다.  


밥 먹고 도서관에 돌아와 다시 자리에 앉았건만 갑자기 옆 테이블 모녀가 짐을 쌉니다. 집중이 안 된다고 집에 돌아간다네요. 순간 조금 화가 나네요. 도대체 무슨 공부를 하겠다는 건지. 그렇다고 나 혼자 도서관에서 머 하나 싶어 함께 집에 돌아왔습니다.


이렇게 집에 돌아와 각자 할 일 하고 저녁 시간이 되었습니다. 조짐이 좋지 않습니다. 아내와 딸아이의 신경전이 시작됐습니다. 아내로서는 집중 안하는 아이가 마음에 들 리 없고 아이는 핸드폰 보고 쉬고 싶은 마음을 안받아주는 엄마가 좋을 리 없습니다. 


제 딴엔 오늘 둘 다 탐탁지 않네요. 무언가 원칙 없이 애를 닦달하는 것 같아 아내도 그렇고, 약속 안 지키면서 괜히 엄마에게 대드는 아이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졸립다고 이미 누워버린 아이에게 엄한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도서관에서 올 때 집에서 하겠다고 한 분량 다 했어?”     

“따로 정해놓은 분량 없었어.”

“오늘 그럼 해야 할 것들 다 했어?”

“안했어”

“그럼 하고 자”


아빠의 평소와 다른 목소리에 아이는 울먹입니다. 아내는 이런 저를 잡아끕니다. 하지 말라고. 이렇게 일요일 밤 시간이 흘렀습니다. 


월요일이 되었습니다. 각자 회사가고 학교 갑니다. 늦게 퇴근하는지라 집에 오니 이미 자고 있습니다. 아이와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습니다. 


화요일이 되었습니다. 각자 회사가고 학교 갑니다. 늦게 퇴근하는지라 집에 오니 이미 자고 있습니다. 아이와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습니다. 


수요일 노동절이라 쉬는 날입니다. 학교는 쉬지 않기에 아이는 학교 갑니다. 쉬는 날이면 제가 애를 학교에 데려다 줍니다. 아내가 등 떠밉니다. 학교 데려다 주라고.


학교 가는 길에 아이와 눈이 마주칩니다. 어색하게 서로 웃음이 터집니다. 장난스레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립니다. 머 특별히 얘기를 나누진 않았습니다. 학교 근처 도착해서 “잘 다녀와, 아빠 운동 간다.” 하고 돌아섭니다. 아이도 “잘 가. 있다 봐.” 합니다. 아이는 항상 헤어질 때 ‘있다 봐’라고 말하곤 합니다. 저녁에 볼 거니까요.


요즘엔 가끔 아이가 낯설어질 때가 있습니다. 커나가고 있다는 징표겠지만 사춘기임을 드러내기라도 하는 양 온갖 불만 가득 표정으로 바라볼 때는 이 녀석이 그 어릴 때 그렇게 귀엽게 달려들던 녀석이 맞나 싶습니다. 


예전 이 녀석에 대해 썼던 글들 몇 편 떠올려 보면 이렇습니다. 


<4월의 베이징, “꽃가루 날려서 이 세상에 꽃냄새 나겠다.”>

<이 팔은 내거야.>

<일상의 단출함>

<“아빠, 택시는 불렀어?”>

<“아빠, 이 책이 재밌어?”>

<아침 6시 50분>

<“음 그래”>

<자전거 수리>

<“소중한 두 개 왜 빼?!”>

<“이상한 게 있네요. 왜 다 30, 50으로 끝나요?”>


다시 읽어보니 혼자서 괜히 마음 따듯해집니다. 이 녀석이랑 이랬구나. 꼬맹이 시절에는 제 책상 위에 이렇게 써놓은 종이를 올려놓기도 했습니다. “아빠 늦게 오는 것에 반대합니다. 항의합니다.”라고.


사춘기 딸이 꼬맹이 시절 아빠 책상 위에 올려놓았던 글


저녁에 또다시 아내와 애가 한 바탕입니다. 집에 오니 냉골입니다. 아내는 잠들어 있고 아이는 X 씹은 표정으로, 눈으로 욕하고 있습니다. 방에 들어가니 딱 한 마디네요. “나가”   


짐짓 못들은 척 애한테 가진 아양을 다 떱니다. “오늘 아빠 회사에서 이런 일 있었다, 다음 주에는 이런 일 있어” 말 붙이고 기분 풀어주려 있는 말 없는 말 쏟아냅니다. 한 편 화내고 한 편 웃음 참느라 아이 얼굴이 묘합니다. 


이렇게 중3 딸아이와 하루 또 무사히 보냈습니다. 사춘기 딸아이를 둔 모든 아빠들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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