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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환난 Nov 16. 2019

14. 아무리 아파도 사람 구실은 해야죠





    개신교인이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는 것처럼, 당시의 나도 사람이 사람 구실 해야 함을 의심하지 않았다. 단순 먹고 자고 싸는 기본 욕구를 충족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회·경제·문화적으로 활동하는 것. 그게 사람 구실이라고 나는 믿었다. 제목처럼! 그것이 누가 주입한 믿음인가, 이제 와서 따져봐야 아무 의미 없었다. 신념이라는 게 흔히 그렇듯.


    그렇다면, 일한 지 고작 4일 만에 사직서를 내고 6월을 맞은 나는? 당연히 사람 구실을 못 하는 인간이었다! 할머니는 방문 너머로 한숨을 내쉬었다. 혼잣말했다. 일을 그것도 못 한다니 어쩌면 좋으냐. 내가 묻고 싶은 질문이었다. 나는 이제 어쩌면 좋아요?


    그 무렵 재활 PT도 그만두었다. 인바디를 잴 때마다 체중은 계속 빠졌다. 1달에 1kg씩 쭉쭉. 그 때문인지 운동할 체력이 받쳐주질 않아서, 상당한 비용을 지출하면서도 효과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사설 피트니스 센터에서 받는 퍼스널 트레이닝은 건강보험도 실비보험도 적용되지 않는다. 시간당 금액을 생각하면 가슴이 갑갑할 만큼 부담스러운 금액이었다. 나으리라는 기대만으로, 그걸 반년 가까이 꾸준히 지출했다.


    여러 번 언급했지만, 트레이너 선생님은 좋은 분이었다. 재활에 관한 지식도 충분히 가졌고 최선을 다 했다. 다만 내가 호전되지 않았다. 그래도 쏟아부은 돈이 아주 무의미하진 않았. 그만둘 즈음엔, 혼자서도 바른 자세로 최소한의 스트레칭과 무산소를 할 수 있을 정도 훈련(!)이 된 상태였다. 이만하면 됐다 싶었다. 새로운 운동을 배우고, 기존 운동의 횟수와 시간을 늘리는 작업당시 몸 상태로는 해낼 수 없었다. 속된 표현으로, 더는 가성비가 안 나왔다. 내 방 요가매트에서 운동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론 여전히 사람 구실 하기에 부족했다. 무능한 몸에 끝없이 자괴감을 느꼈다. 파트타임이라도, 어떤 단순노동이라도, 단 몇 시간이라도 좋으니 부디 남들처럼 살고 싶었다. 쉬고 있자면, 아픈데도 상시 초조했다. 다시 아르바이트 구인 어플을 켰다. 콜센터 파트타임 자리를 찾았다. 콜센터는 경력이 있었다. 해본 일 중에 가장 몸이 편했다.


    그리고 정신과를 옮겼다. 여러 번 언급한 C정신과였다. 어떤 일로 오셨나요? 묻는 말에 대답했다. “잠을 못 자고 힘들어요.” 그 정도로 내가 얼마나 지쳤는지 무지했다. 그저 당장은 수면제가 필요했다. 불면증이 아주 불편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안정제가 없으면 새하얗게 밤을 새다. 잠에 들지 못했고, 잠에 들어도 수면을 유지하지 못했고, 자다가 깨면 다시 잠들지 못했다. 우울하고 불안하고 아파서.


    전원이 꺼지지 못한 채, 고장 난 컴퓨터처럼 과열되는 밤의 연속이었다. 감정과 통증은 자정이 지나면 마법이 풀린 듯 과잉해졌다. 자다가 깨면 울거나 자해했다. 할머니는 10시면 잠들어 내 방문을 열어볼 일이 없었다. 한밤의 방은 나만의 독채였다. 아무도 내가 무슨 짓을 하는지 몰랐다. 그리고 나는 숨 쉬듯이 죽음을 열망하는 우울증 환자였다. 여러모로… 나는 자야 했다.


    C정신과는 처음에 내 신체적 증상이 신체화 장애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런 쪽에 효과가 있다는 약을 처방했다. 그게 둘록세틴이었다. 흔히 심발타라고 부르는 그것. 만성 요통 환자에게 쓰인단 말을 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약을 잘 챙겨 먹었다. 신체화 장애든 만성 요통이든, 뭐라도 좋으니 덜 아팠으면 싶었다.


    아침 식후에 둘록세틴과 항불안제, 자기 전 졸피뎀과 안정제가 곧 루틴이 되었다. 약물 처방이 하도 바뀌어서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쨌든 자기 전약은 불면증에 특효였다. 그 유명한 졸피뎀을 복용하는데, 잠이 안 올 리가.





    이제 먹고 자고 싸는 기본 욕구는 충족했다.


    콜센터 면접은 쉽게 잡혔고 취직은 더욱 쉽게 됐다. 콜센터엔 늘 사람이 부족하다. 최저시급 받고 주 12시간 일하는 조건이었다. 하루 4시간 파트타임, 출퇴근 시간은 편도 30분. 단순 업무라 교육도 짧았다. 기본적으론 앉아서 전화만 받으면 되는 일이었다.


    몸만 편하고 마음은 불편하지 않냐고? 몸이 힘들다 해서 꼭 마음이 편한 것도 아니더라. 나는 하도 내향적이라서, 업무와 무관하게 가족 같은 분위기(!)로 지내야 하는 매장에서 일할 때 제일 힘들었다. 콜센터 최고의 장점은 동료와 커뮤니케이션할 필요가 전혀 없단 거였다.


    진상에게 욕 얻어먹을 각오야 당연히 했지. 언젠가 생면부지의 아저씨가 끝도 없이 육두문자를 포함한 인신공격을 쏟아내는 콜을 받은 경험이 있다. 그렇게 욕먹으면 물론 기분 나쁘다. 불현듯 떠오르면 짜증 난다. 그런데 막, 상처를 입고 그러진 않았다.





    나를 진실로 상처 입힐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다.


    할머니의 ‘한심하다’ 소릴 듣고 내가 울면, 마치 할머니가 내게 상처를 준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내가 한심하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기 때문에 그 말이 아픈 거다. 나는 한심함을 곱씹고, 한심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무능을 곱씹으면서 상처 입는다. 그리고 나서야 눈물이 나온다. 줄줄.


    한편 인정할 수 없는 말로 나를 비난한다면, 아무리 거친 말이라도 나는 상처입지 않는다. 예를 들어, 할머니는 내 탈색모를 싫어해서… 그 양아치 같은 머리 어떻게 좀 하라고 습관처럼 잔소리했는데, 나는 아무렇지 않았다. 심지어 내 머리가 도널드 트럼프 같다고 했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았다. 나는 내 샛노란 머리를 좋아하니까! 할머니 죄송해요!





    하여튼 나는 콜센터에 취직을 했다. 6월이었다. 드디어 사람 구실을 하게 되었으므로… 나는 상황이 나아지리라 믿었다. 이쯤 되면 전개가 반복되어 뻔하게 느껴질 텐데. 그 믿음은 새로 나타난 증상으로 인해 깨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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