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실수, 그리고 커다란 미소
대학에 갓 들어간 나는, 이런 세상이 또 있나 싶을 정도로 젊음을 만끽했다. 그간 워낙 집에서 학교와 미술 학원만을 오갔던 터라, 그동안 짊어지고 있던 '고3의 무거움'을 가능한 한 빨리 훌훌 털어내고 싶었다. '이제는 좀 놀아볼까?' 하는 마음으로 주말에는 친구들을 만나서 카페에서 수다도 떨며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물론, 매일 그랬던 건 아니다. 주중에는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수업이 일찍 끝나는 월요일과 금요일은 미술 학원에서 강사로 아르바이트하고 돈을 벌었다. 일을 마치고 나서는 미술학원 근처에 있는 어느 가정집의 벨을 눌렀다. 자정이 넘은 늦은 시간까지 고2 여학생에게 수학을 가르치고, 과외비를 받아서 푼푼이 돈을 모았다.
아르바이트비와 과외비를 받은 어느 날, 엄마에게 말을 꺼냈다.
"엄마! 나랑 같이 카페에 한번 가볼래?"
'커피를 마시는 곳'이라면 ‘다방’만을 알고 있던 엄마에게, 이런 세상이 있다고 꼭 한번 보여드리고 싶었다. 무엇보다 친구들과 함께하는 것들을 엄마와도 함께 하고 싶었다. 모락모락 피어나는 뜨거운 김을 호호 불어가며 엄마와 커피를 마시며 도란도란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런 내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걸까? 엄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강남의 어느 카페에 도착했다.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문득 스치는 생각.
'어? 그런데, 내가 직접 주문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는데?'
그랬다. 단 한 번도 없었다. 주문을 해본 적이 없었다. 친구 여럿이서 카페에 가도 주문을 하는 친구는 따로 있었다. 엄마 커피까지 좋은 걸로 시키겠다고 호언장담하고서는 식은땀이 났다. 등짝이 불편했다. 엄마가 나를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힐끗 고개를 돌려보니, 다행히도 엄마는 낯설기만 한 카페 안을 구석구석 살피느라 바빴다.
일단 메뉴판에 시선을 고정했다.
‘에스프레소?’
어쩐지 그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캐러멜 마키아토'와는 어딘가 다른 특별함이 있을 것 같았다.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주문을 받은 직원이 나에게 무언가를 물었는데, 무슨 말인지 전혀 알아듣지 못했는데도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네네.”
나에게 뭐, 이상한 걸 물은 것은 아닐 테니까.
‘이름도 예쁘니까 당연히 맛도 좋겠지?’
엄마가 좋아할 것 같았다. 젊은 시절 엄마가 아빠와 데이트했다던 ‘다방’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라서, 엄마는 속으로 굉장히 놀랐을 거다. 딸 덕분에 '카페'라는 곳에는 처음 와보았을 엄마를 바라보며 내심 흐뭇했다. 속으로 씩 웃었다. '엄마가 좋아하면 좋겠다.'
주문한 커피가 나왔다고 빨간불이 들어온다. 진동벨을 들고 카운터 앞으로 쪼르르 달려가서 두 손으로 쟁반을 받았다.
‘이게 뭐지? 잘못 나온 건가?'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쟁반 위에 놓여있는 이 작은 컵 두 개는 뭐지? 시럽인가? 설마, 이게 '에스프레소'라는 건가?’
짧은 시간 동안 내 머릿속에서 많은 질문들이 스쳐 지나갔다. 눈동자를 몇 번 돌리는 동안, 나의 실수를 감지했다.
‘그러게, 잘 알지도 못하면서, 왜 이런 걸 시켰나. 분명 '에스프레소'가 맞는 것 같기는 한데...'
직원에게 물어보면 내가 얼마나 바보 같아 보일지 단숨에 그려졌다. 기대에 찬 엄마를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막내딸이 아무것도 모르면서 주문한 거라고 차마 말씀드릴 자신이 없었다. 창피했다. 그리고 죄송했다. 좋은 것 사드리고 싶었는데, 아이들 장난감처럼 보이는 이 작은 컵을 엄마에게 드려야 한다니...
'물을 타서 마셔야 하나? 같이 나온 각설탕을 넣어서 먹어야 하나? 엄마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핸드폰으로 검색했다. '에스프레소 먹는 법'을.
맞은편에 앉아 있는 엄마에게 천천히 얼굴을 내밀었다. 나는 천연덕스럽게 엄마에게 말을 건넸다.
“엄마, 이게 에스프레소야, 에스프레소. 이거 너무 귀엽지?.”
작은 커피잔을 왼손으로 들고 애써 웃음을 보였다. 엄마는 잠시 작은 커피잔을 보더니 이내 덩달아 웃었다.
엄마와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세상에서 가장 쓴 커피를 마셔보았다. 어쩌면 엄마는 나의 실수를 이미 알았을 거다. 막내딸이 민망할까 봐 그저 모른 척했을 거다. 그래, 그랬을 엄마다. 다만 알면서도 모르는 척, 그게 바로 엄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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