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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ydia Youn May 30. 2020

이번에는 다를거야

 기억도 나지를 않는다. 지구 어딘가에서 사 온 찻잎을 넣은 티백을 우려내고 침대로 돌아간다. A는 침대에서 무언가를 먹고 마시는 것을 즐기는 여자다. 지구 어딘가에서 사 온 찻잎을 우린 차와 함께라면 더 좋겠지만 엄청나게 높은 확률로 그녀는 그 액체를 결국 침대에 쏟곤 한다. 쏟을 것을 알면서도 뜨거운 차를 기어코 끓여서는 기어코 들고온다. 기어코 침대위로 차와 함께 기어 올라간다. 한 손은 차를 움켜쥐고, 한 손은 허리를 받힐 베게를 다시 놓으면서.


"아, 좋다."

입에서 나오는 말은 좋다는 말 뿐이다. 오른 손이 덜덜 떨린다. 평소에는 이정도로 무겁지 않았던 머그잔은 침대에 올라올 때 만큼은 유난스럽게도 무거워진다. 전처럼 또 잔을 놓치고 말까 덜덜 떨면서도 기어코 침대로 가져오는 대단한 용기다. 그녀는 킹사이즈 침대 한 켠에 몸을 뉘이고 바로 옆 빈자리에 머그잔을 놓았다. 위태롭지만 참 좋다고 생각하면서.


"아, 뜨겁다!"

입에서 나오는 말은 뜨겁다는 말 뿐이다. 혀가 데인 것 같다. 참 좋다고 생각하며 후후 불지도 않고 벌컥 들이켠 차가 정말이지 참을 수 없을 만큼 뜨겁다. A는 뜨거운 차를 벌컥 벌컥 들이키는 여자다. 뜨거워서 데이면 좀 어떠냐면서. 그리고는 다시 옆자리에 머그잔을 놓는다. 잊는다.


"아, 또 쏟았어."

입에서 나오는 말은 또라는 말 뿐이다. 또 팔꿈치로 머그잔을 기어코 치고야 말았다. 옆자리에 머그잔에 담긴 원산지를 알 수 없는 식어가는 차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잊고 싶었는지 정말로 잊은건지 기어코 치고야 말았다. 혹은, 엎질러 버리고 싶었던 걸까?


"다시 가져와야지."

입에서 나오는 말은 다시 해보겠다는 말 뿐이다. 아까와 똑같은 머그잔에 아까와 똑같은 찻잎을 우려내면 같은 차가 될까. 여자는 의심을 품은 채로 같은 찻잎을 고르려다가 같은 브랜드의 약간 다른 향을 가진 찻잎을 넣은 티백을 고른다. 팔팔 끓는 물을 같은 잔에 담고 이번에는 약간은 다른 찻잎을 다시 우려내기 시작한다. 찻잎이 우러난다. 여전히 지구 어딘가에서 샀는지는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아무튼 향이 좋다.


"아, 좋다."

입에서 나오는 말은 좋다는 말 뿐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옆에 놓지는 않는다. 출렁출렁 위험할까봐, 출렁출렁 또 다 쏟아내고 말까봐, 출렁출렁 또 쏟아진 차가 여자의 이불을 더럽힐까봐, 출렁출렁 또 그 이불마저 아름답다고 끌어안을까봐. 창문 가에 놓는다.


"아, 미지근해."

입에서 나오는 말은 미지근하다는 말 뿐이다. 창가에 놓인 머그잔은 옆에 두어 쏟고 말았던 머그잔 보다는 더 오랜 시간 그녀의 곁에 있었지만, 그녀는 좀처럼 창가의 머그잔을 떠올릴 수 없었다. 그녀의 바로 옆이 아니었기 때문에, 쏟을 수도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침대를 떠나고 다시 돌아오는 길에 창가의 머그잔을 바라보며 다시 마셔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미지근해. 미지근해서 좋아. 좋다는 말은 잊었다.


"....."

그녀와 창가의 머그잔 사이에는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다. 얼마나 미지근하고 뜨거운 차인가. 오랜 기간 잊어서 차게 식었을 줄 알았던 차는 결코 차게 식지 않았다. 여자는 데인 혀를 씹어본다. 데인 혀를 씹어본다. 미지근한 차가 혀를 감싼다. 목으로 넘어간다.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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