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에 대한 기억 조각 열하나
아빠는 엄마에게 로맨틱한 남편은 아니었다. 엄마는 줄곧 아빠와 함께 살아온 삼십여 년 간 그 흔한 선물 하나 받지 못했다고 불만을 토로했었다. 너네 아빠가 그 흔한 꽃 한 송이 사 오기를 했냐는 것이 엄마의 주된 레퍼토리였다. 내가 봐도 영 멋이 없는 남편이었다. 아빠는 결혼기념일, 생일, 각종 기념일에도 꽃 한 다발 사 오는 법이 없었다.
엄마는 그저 나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떤 봄날 아빠가 길가에 흐드러지게 핀 개나리 한 다발을 꺾어다준 것이 전부였다고 말했다. 나로서는 청년이었던 아빠가 없는 주머니 형편에 개나리라도 선물하기 위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나뭇가지를 꺾는 장면이 처량하지만 왠지 로맨틱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말이다. 어쨌건 간에 엄마의 불만이 이어지면 아빠는 다시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던 지난겨울이었다. 엄마는 나를 만나자마자 한껏 들뜬 목소리로 "너네 아빠가 너랑 나한테 커플 반지를 사준대."라고 말했다. 엥? 무슨 커플 반지? 엄마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사연은 이랬다. 엄마와 아빠는 항상 주말에 산책하며 티격태격하곤 했었다. 그날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당신이 나한테 뭐라도 하나 사줘 봤나? 당신 죽으면 내가 뭘 보고 당신을 기억하겠노."하는 엄마의 장난스러운 타박에 아빠가 못 이긴 것이었다. 아빠에게선 생각지 못한 답이 나왔다.
"그러면 당신이랑 딸이랑
반지 한 개씩 사줄게.
백화점 가자."
엄마의 신난 목소리를 듣고도 나는 괜히 기분이 이상했었다. 반지 끼는 걸 싫어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평소 손가락에 반지를 여러 개씩 낄 정도로 반지를 좋아했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아빠의 선물 공략에 마음 한편이 불편해졌다. 그래서 엄마의 말에게 찬물을 끼얹고야 말았다. "나 반지 더 갖고 싶은 것도 아니고. 백화점 가서 사면 너무 비싸기도 하고. 난 안 할래." 그러자 엄마는 짜게 식은 말투로 "네가 안 한다 하면 너네 아빠가 나한테 사주겠나. 딸 사주려고 나도 끼워서 같이 사준다고 한 거지."라고 말했다. 토라진 엄마는 "나도 안 할래. 김샜다"하며 화제를 돌렸다.
필요하지 않은 비싼 선물을 받는 것이 거절의 주된 이유이긴 했다. 근데 꼭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었다. 선물을 받아본 적 없는 건 엄마만이 아니었다. 나 역시 삼십 년 넘게 살면서 아빠에게 선물은 받아본 적은 없었다. 내 생일을 챙기지 않았던 적은 없었지만 아빠는 늘 나에게 선물 대신 용돈을 주었다. 어떤 해에는 그런 것이 불만일 때도 있었다. 호강에 겨운 불만인 건 알지만 때론 마음이 담긴 선물을 받고 싶었다. 딸이 뭘 좋아할지 떠올리며 사 온 선물 같은 거. 아빠는 그런 내 마음과 다르게 한결같이 돈으로만 마음을 표현했었다. 그런 아빠가 갑자기 선물을 준다는 게 너무 묘하게 느껴졌다. '아빠가 왜 안 하던 행동을 하는 거지? 어디 아픈 걸까?' 온갖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는 괜히 무서워졌다.
나의 거절을 엄마로부터 전해 들은 아빠는 싫으면 됐다는 투로 "걔가 안 한다면 니라도 해라."라고 대답했다. 평소다운 아빠의 대답이 불안했던 마음을 다시 가라앉게 했다. 그리곤 얼마 뒤 엄마는 백화점이 아닌 엄마의 단골 금은방으로 아빠를 데려갔고 반지 선물 하나를 획득했다. 그게 지난 12월 크리스마스가 오기 직전의 에피소드였다. 결국 난 아빠가 사주는 반지를 사지 않았고 아빠는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며 반지를 포기했으니 이거라도 하라며 지갑 속 백화점 상품권 10만 원을 건넸다. 괜히 반지가 아쉬워진 난 "아빠 더 줘."라며 떼썼고 아빠는 줄 때 받지 그랬냐며 콧방귀 뀌었다. 그 10만 원으로 나는 백화점에 가서 남편과 바지 하나씩 사 입었었다.
그것이 아빠의 마지막 선물이었다. 그땐 누구도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예상하지 못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엄마의 수많은 타박에도 수십 년 동안 굴하지 않았던 아빠가 올해 들어 갑자기 그런 선물을 했었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나지 않아 사고는 일어났다. 아빠의 장례식 때 엄마가 말했다.
"그래도 너네 아빠가 마지막으로
내한테 반지 하나는 사줬네."
그렇게 아빠가 엄마 손에 반지 하나를 끼워준 것이 나로서는 참 감사했다. 왠지 엄마가 기억하는 아빠의 마지막 모습이 그렇게 야박하지만은 않을 것 같아서 말이다. 엄마에게 원망만을 남기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아빠의 마지막 선물은 아빠와 우리가 함께 보낸 마지막 겨울을 따뜻하게 장식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