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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eer Feb 17. 2023

아빠에 관한 각종 TMI

아빠에 대한 기억 조각 열둘

1. 아빠는 젊은 시절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아빠는 내 나이 때 못하는 운동이 없었다. 아빠의 운동 실력은 장르를 가리지 않았다. 볼링, 축구 등 사내 온갖 운동 경기에서 우승해 상품을 타오곤 했었다. 우리집의 소형가전제품은 줄곧 아빠의 전리품들로 채워지곤 했었다. 당시 어린 나는 아빠의 상품 언박싱에 꽤나 심취해있었다. 아빠가 상품을 타오면 내가 먼저 나서서 상품을 열어보고 즐거워했었다.


  중년이 된 아빠는 동료들과 골프도 치러다녔다. 알뜰한 아빠는 스스로 회원권은 끊지 못하고 스크린 골프장을 다니며 연습하거나 회원권이 있는 동료에게 껴서 골프를 즐기곤 했었다. 동료들과 골프 대결에서도 꽤나 좋은 실력을 거두었다는 이야기도 자주 들었던 것 같다. 아빠의 골프채는 여전히 우리집 베란다에 남아있다.



2. 아빠는 간식을 정말 좋아했다.

  아빠는 꽤나 간식을 즐겨먹었다. 사진 속 젊은 아빠는 영 삐쩍 말라 있었다. 엄마는 당시 아빠가 너무 말라서 다들 엄마가 굶기는 줄 알까봐 걱정했다고 했다. 내 기억에도 젊은 시절 아빠는 그렇게 간식을 좋아했던 것같진 않다.

  그러나 중년이 된 아빠는 꽤나 간식을 좋아하셨다. 좋아하는 간식의 종류는 다양했다. 스포츠 경기를 볼 땐 마른 오징어나 쥐포 먹는 걸 즐기셨다. 아침에 엄마와 커피 타임을 가질 때에는 엄마의 달콤한 간식을 한 입 얻어먹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셨다. 내가 과자를 사먹을 때도 아빠는 꼭 내 옆으로 와서 한 주먹 가져가곤 하셨다.


  아빠의 최애 간식은 단연코 단팥빵이었다. 아빠는 단팥빵을 좋아하셨다. 단팥의 달콤함과 어릴적 향수가 아빠의 입맛을 자극했던지 단팥이 들어간 음식을 자주 즐기셨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달콤한 팥빙수를 먹고싶어하셨다. 팥빙수 아이스크림을 사다드리면 거기에 우유를 부어먹으면서 세상 만족한 표정을 지으셨다. 평소 빵집에서 빵 쇼핑하는 걸 좋아하는 나는 항상 단팥빵은 두개씩 샀다. 단팥빵 한 개로는 아쉬워하시는 아빠를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마음이 바뀌는 날도 있으셨던 것 같다. 어떤 날은 내가 하도 단팥빵만 사다드리자 지겨우셨는지 엄마한테 슬쩍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했다. "딸 보고 이제 단팥빵 말고 다른 빵도 같이 사오라고 하지?" 그러자 엄마는 "당신 그러다가 단팥빵도 안사오려면 어쩌려고?"라고 대답하셨고, 아빠는 "그것도 맞네. 그냥 가만히 있자."고 하셨다고 했다. 두 분의 그 대화를 생각하면 왠지 귀여워서 웃음이 난다.



3. 아빠의 아침 루틴 중 하나는 커피 타임이셨다.

    아빠는 아침에 꼭 커피를 즐기셨다. 커피를 처음부터 좋아하셨던 건 아니었던 것 같다. 젊은 시절에는 직장에서 믹스커피 먹는 정도였을 것이다. 아빠가 커피를 좋아하게 된 건 엄마때문이었다. 엄마는 커피를 정말 좋아하신다. 좋은 원두를 내려 달콤한 디저트 먹는 것이 엄마의 중요한 낙이었다. 그런 엄마와 함께 커피를 마시다보니 아빠 역시 커피의 맛을 알게 되셨다고 했다.


  이제는 회사 커피는 못먹겠다면서 항상 엄마와 커피를 한잔 마시고 직장에 나가셨다. 엄마는 모카포트에 곱게 간 원두를 넣어 끓이셨다. 그때 아빠는 물을 끓이는 담당이었다. 평소 아웅다웅하시던 엄마, 아빠가 아침에는 꼭 환상의 콤비로 돌변하셨다. 아빠가 주전자에 물을 끓여놓으면 엄마는 그 물을 포트에 넣고 커피를 우려내셨다. 딱 쿵짝이 잘 맞았다.


  커피에 곁들이는 디저트는 매번 바뀌었다. 어떤 날엔 내가 사온 마카롱을, 어떤 날엔 달콤한 초콜렛을, 또 다른 날엔 에그타르트와 함께 커피를 즐기셨다. 항상 바빴던 아빠가 조금이나마 아침에 여유를 찾았던 시간인 것 같아 보기가 좋았다.



4. 아빠는 노래 관련 프로그램을 정말 좋아하셨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아빠는 음치셨다. 회사에서 회식 등에서 노래 부를 일이 있으면 은근 스트레스를 받아하셨다. 하지만 항상 열심히 하는 성격인 아빠는 회식마저 미리 준비하셨다. 노래방에 가서 회식에서 부를 노래를 연습해보곤 하셨다.


  본인이 노래를 못하는 것과 별개로 노래 자체는 정말 좋아하셨다. 항상 노래 경연 프로그램을 즐겨보셨다. '나는 가수다'부터 '복면가왕', '싱어게인'과 같은 프로그램을 빼놓지 않고 보셨다. 어쩌면 그 경연 프로그램들의 흥미진진함을 즐기셨을지도 모르겠다. 최근에는 '불타는 트롯맨'이나 '미스터 트롯'같은 프로그램들도 챙겨보셨다. 어느 날은 아빠가 평소답지 않게 늦잠을 주무셨다고 했다. 남편이 하도 일어나지 않자 의아했던 엄마가 이유를 물어보니 전날 밤에 트로트 프로그램을 끝까지 지켜보다가 늦잠을 잤다고 대답하셨었다. 부지런하고 성실한 아빠의 늦잠 사유가 티비 시청이어서 신기하고 재밌었다.   



5. 아빠의 퇴근 인사는 브이였다.

  아빠는 줄곧 다섯시에서 여섯시 사이 퇴근하셨다. 그 시간 엄마 집에서 운동갈 준비를 했던 나는 쇼파에 앉아 쉬고있을 때가 많았다. 아빠는 쇼파에 앉아 뻗어있는 나를 보며 항상 손가락으로 브이를 만들어 흔들었다. 아빠의 시그니처 인사법이었다. 무뚝뚝한 아빠가 할 수 있는 반가움 표현의 극치였던 것 같다. 지금도 쇼파에 앉아 있으면 아빠가 걸어들어오며 나를 향해 손을 흔들 것 같다.



6. 아빠는 통화를 할 때 '그.. 저....'라는 말을 많이 썼다.

  난 말주변이 없는 편이다. 머릿 속에 표현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입으로 조리있게 잘 나오진 않는다. 아빠도 나와 비슷한 것 같았다. 아빠가 누군가와 통화할 때 자주 '그....이것 있잖아요. 그....저...그게....'하며 대화를 시작했다. 아빠 특유의 말버릇이었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아빠의 목소리가 그리웠던 나는 아빠의 휴대폰을 뒤졌다. 휴대폰엔 아빠가 통화하다가 실수로 녹음된 듯한 녹음본이 몇개가 있었다. 휴대폰 사용이 서툰 아빠는 그게 녹음된 지도 몰랐을 것 같다. 그 녹음본엔 아빠의 목소리가 있었다. 누군가와 맥주 약속을 하는 아빠, 누군가와 업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아빠가 있었다. 그 대화들에도 여전히 아빠의 말버릇은 남아있었다.



7.  아빠는 은근 명언을 좋아했던 것 같다.

  이건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보게된 아빠의 일기장엔 온갖 명언이 적혀있었다. 외국 유명인사들의 명언부터 고사성어들이 여러 장 적혀있었다. 아빠는 명언 밑에다 자기 생각을 덧붙이기도 했다. 때론 강연을 듣고 정리한 내용을 일기장에 쓰기도 하셨다. 최근 들어서는 자기 인생에 대한 우선순위같은 것들도 정리해보신 흔적도 있었다. 그런 유명인사들의 글귀들을 적어보며 아빠는 더 열심히, 더 부지런히 잘 살 것을 다짐하셨을 것 같아 울컥했다.



8. 아빠는 자신의 큰 키에 자부심이 있었다.

  아빠는 180cm가 넘는 키를 항상 뿌듯해하셨다. 평소 본인 나이 때에 이런 키 가진 사람 별로 없다면서 자랑하시곤 했다. 가끔 시장에서 아주머니들이 "키도 크고 훤칠하시네." 이런 칭찬을 하면 아빠는 은근 좋아하시며 아줌마들과의 농담을 즐기곤 했다. 엄마는 그런 아빠를 보며 "허리가 긴 거지. 다리가 긴 게 아니잖아."하며 샐쭉거리시곤 했다.




 여기까지 오늘의 각종 TMI였다. 이 글을 쓰게 된 건 아빠에 대한 사소한 기억들을 잃고 싶지 않아서 이다. 서른 세살, 현재의 나는 아빠의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다. 아빠의 머쓱한 표정부터 장난칠 때의 표정, 종종 집에서 술을 마시는 날 보며 '술고래냐며' 눈을 크게 뜨며 혀를 내밀며 놀리는 듯한 표정, 퇴근하며 인사할 때 손동작같은 기억들이 모두 생생하다. 지금이라도 아빠가 방에서 걸어나와 식탁에 앉아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오십살의 나도 그럴까. 아빠에 대한 기억을 점점 잃어갈까 두렵다. 아빠에 대한 커다란 기억은 잘 기억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오늘의 TMI같은 것들을 기억해내지 못할까봐 걱정스러웠다. '사진 속 아빠'가 아닌 '동영상과 같은 아빠'로 입체적인 모습으로 아빠를 기억하고 싶었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도 거기서 출발했다. 아빠를 오랫동안 잘 기억하기 위해서.

 

  엄마도 나와 비슷한 나이에 '엄마의 아빠'를 잃었다. 그래도 엄마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외할아버지는 매너가 좋으시고 다정한 분이셨던 것 같다. 엄마는 유년기 외할아버지와의 추억을 따뜻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 엄마처럼 나도 아빠를 오랜 시간동안 마음에 두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아빠를 머릿 속에 끊임없이 떠올리는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듯 내 마음 속엔 아빠가 영원히 살아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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