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취가 진해지고 싸구려는 늘어갈 거야.
286. 번쩍하고 만다. 번개가. 그렇지는 않다. 자국을 남기고 하늘에 만개. 구름을 찢고 봉합하고 터진 솜덩이 곰돌이 빗 속으로 침투하고 신발 밑창에 붙어 떨어지지 않기로 한다.
287. 할 수 있는 만큼의 사치만 하면서 살아남기로 한다. 난 끔찍하고 끔찍하면서 줄을 긋고, 정수리에서 번지는 불꽃. 선명과 선염. 염색하면서 굴어대네.
288. 방법이 없겠지. 방법이 없으니 굴 수 있는 방법은 늘어가는 가지. 시시해지면서 죽어가는 거. 멍청해지면서 고독해지는 방법. 장작과 정적. 조작하지 않고 우승한다.
289. 세상에 있는 선이라는 게 굉장히 단순해서 단순하다고 믿으면서도 적어도 악보다는 간편하다는 걸 알고 있으니 우리는 모두 선해지려고 하네. 밤이면 왜 이렇게 글을 읽으려는 사람이 많아지고 많아지는 만큼 굴 수 있는 마음은 적어지면서 흰 구두와 스니커즈는 어째서 매치할 방향성이 다른 걸까.
290. 이 모든 게 예술로 포함되지 않도록. 겨우 예술이라는 게 이 정도로 죽어가지 않도록. 밀린 일기도 제대로 처리 못하면서 피식거리지 않도록.
291. 나는 여기까지 하기로 합니다. 당신이 했던 말을 모조리 지워가면서 번진다.
292. 숙취가 진해지고 싸구려는 늘어갈 거야. 난 믿고 싶겠지. 우리가 했던 말이라는 게 이렇지는 않을 거라고.
293. 이번에는 다를 거야. 저번에도 다를 거고. 항상 다 다르겠지. 그렇다고 뭔가 바뀌지는 않아. 그 밥에 그 나물. 아스팔트 위에 아스팔트를 덮는 일인거지. 쓸모없고 하찮아.
294. 이런 일로 인생이 이루어진다는 걸 인정할 수 없었네. 실제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었겠어. 다 옛일이었어. 버려지고 시시해질 뿐이었던 거야.
295. 글을 읽고도 감흥하지 않는다. 점차 무해해지고 잊기 쉬워진다. 내가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게 아니라 고작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그런 생각이 들고나면 서글퍼진다. 나란 인간의 무용함은 새삼스러워지고 다시 사는 기분을 받는다. 다시 무용해지는 거다.
296. 극적인 변화 같은 거 나 믿지 않아. 그러려면 진작 바뀌었어야지. 변하고 믿어 왔어야지. 시시하고 꿈꾸면서 시시한 꿈에 졌어야지. 소멸하고 망가져야지. 살아지는 대로 사는 게 아닌 살아지는 게 곧 사는 거라 믿어야지.
297. 성실하게 믿어야 지속되는 게 어떤 경우나 성서처럼 느껴졌다. 등짝에 차오르는 땀처럼. 모든 게 다 젖고 말았다. 어쩌겠나. 여름인 걸 만끽해야 했다.
298. 다른 이들의 축하를 축하 다음을 축하 말고도 일궈내야 하는 걸 해야겠다 싶었고 그러고 나니 세상이 조금은 달라 보였다. 할 수 없는 일은 분명 존재하겠으나 할 수 있는 일도 분명 존재했다.
299. 내가 위로받았던 문장은 모두 내가 벗어나고 싶었던 약한 모습을 쓰다듬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시시해지고 덧없어지면서 나아지는 게 전부고, 그건 무서웠지. 오래되었고 파사삭 부서지면서.
300. 세간에 내가 벗어놓은 허물이 돌아다닌다고 했다. 우린 이전과는 좀 달라지면서 못 한 얼굴이 되었다. 못 난 얼굴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