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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의 너에게 2


   29년 전, 첫 아이를 낳았을 때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30시간이 넘도록 산통과 싸웠지만 결국 마취를 하고 배를 갈라서 아이를 꺼냈다.

마취가 풀리면서 병실의 벽의 시계를 봤었다.

토요일 오후 3시 45분, 금요일 오전에 병실로 들어왔는데 꼬박 30시간의 전쟁을 치러야 했다.

급작스런 수술로 피투성이 환복을 갈아입히지 못했는지 시동생이 왔다가 놀라서 가버렸다고 나중에 남편이 말해주었다.









   아이를 낳는 것은 아무리 포장을 해도 고통이다.

자연적이고 원시적인 고통이다.

하나의 생명체가 하나의 생명체를 찢고서야 세상에 나오는 원시 그대로의 고통이다.

언젠가 TV에서 개의 출산 장면을 본 적이 있다.

새끼 강아지를 한 마리도 아닌 여섯 마리를 낳고 기진맥진 누웠있던 어미개를 보며 눈물이 핑 돌았다.

새끼들은 본능적으로 어미개의 젖을 빨려고 매달렸다.

단 한 마리의 새끼도 밀치지 않던 그 어미개의 모성에 마음이 아팠다.







  아이를 낳았으니 이제 기나긴 육아의 시간이 남아 있다.

육아는, 30시간 출산의 고통과는 비할 바가 아닌 기나긴 장기 프로젝트이다.

은근과 끈기, 허용과 적절한 훈육이 있어야 하는 종합예술이다.

거기에 사랑과 희생은 덤이 아닌 필수이다.


엄마들끼리 하는 말이 있다.

아이의 수준이 딱 엄마의 수준이라고.

아이가 유치원생이면 엄마도 딱 그 수준이고

아이가 초등학생이 되면 엄마도 딱 초등학생이 된다.

그렇다. 엄마도 처음부터 엄마는 아니었다.

아이와 함께 엄마도 자란다.


엄마도 실패하고 넘어지고 지친다.

특히나 그 엄마의 내면에 운디드 차일드(유아시절 상처받은 내면의 아이)가 있다면 더욱더 실패가 깊다.

어지간한 자기 성찰과 끈기와 힘이 있기 전에는 육아는 정말 버거운 일이다.


엄마의 내면에 운디드 차일드가 있다는 것은 또 그 엄마의 잘못은 아니다.

그 엄마의 엄마 역시 그랬을 확률이 높다. 그냥 그것은 모성의 대물림일 뿐이다.







  

   인류가 항상 모성을 존중하고 어린아이를 금이야 옥이야 키웠던 것은 아니다.

아이의 인권이 다뤄지기 시작한 것도 인류의 역사에 비하면 그리 유구한 역사는 아니다.

새로운 시절, 여성들은 자연의 모성 외에 의무와 책임을 더 많이 부여받게 됐다.

마치 우리 사회가 1960년대 이후 자본주의 시장으로 급격한 사회변화를 겪으며 농사만 짓던 아버지들이 새로운 사회에 적응 못하고 기존 질서의 삶을 고수하며 도태된 시기가 있었듯이 지금은 여성들의 모성과 육아가 과도기에 있는 것 같다.

시중에는 많은 육아서와 심리학 서적들이 쏟아져 나오고 여성들은 스스로 배우며 육아라는 전쟁을 치르고 있다. 









  

  문제는 대한민국 사회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회가 아니란 것이다.

너무도 경쟁적인 이 사회는 모든 나이와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경쟁으로 내몰리는 사회다.

아이도 엄마도 아빠도 모두 경쟁을 피할 수 없다.


개인의 성취와 행복은 없는 이 잔인한 사회.

아이들은 엄마의 태속에서부터 경쟁에 내몰린다.

거기에 아이들의 모든 성취는 결국 주부의 몫이다.

엄마들은 이마에 아이의 모든 것을 붙이고 다녀야 한다.


 아이가 또래보다 키가 좀 작다고 하면 그건 유전의 탓이 아닌 전적으로 엄마의 탓이다.

심지어 그 엄마가 전업주부라고 할 때 비난의 눈초리는 더욱더 따갑다.

이렇게 잔인하고 이상한 사회에서 엄마와 아이와의 갈등은 이미 출생부터 같이 싹이 튼다.

그 싹은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잠잠하다가 사춘기를 시작으로 터져 나온다.

갈등의 시작, 사춘기 전쟁의 서막이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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