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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제보다 나은 오늘 Jul 15. 2022

수염을 기르기 시작했다

누가? 내가!

 파키스탄 파견 생활 7개월 차.


 해외살이 자체가 처음이라 불편한 저개발국에서 과연 제대로 살 수 있을까 했는데, 사람 사는 곳은 어디든 뭐 다 대충 비슷해서 정 붙이고 사니까 또 살만하다. 되려 너무 잘 적응하고 있는 것 같아서 한국으로 복귀하면 잘 살 수 있을까 걱정이 벌써부터 된다. ㅠㅠ 괜한 걱정이 아니라, 다수의 해외 파견자 분들이 복귀 후 한국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시 또 파견자 선발에 손을 드는 것을 보면 해외살이는 분명 그만한 매력이 있다.


 파견생활 처음에는 한국식 문화만 고집을 했는데, 반년 넘게 살다 보니 나도 점점 현지화가 되어간다.


[현지화 1]

 출근 시 양말을 더 이상 신지 않는다. 여름이 긴 이 나라는 안전화를 신어야만 하는 현장 작업자를 제외하고 일반 사무실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양말을 신지 않는다. 신발도 가죽 샌들이 기본에 슬리퍼 차림도 흔하다. 모두 정장 바지에 구두를 신고 오고, 어쩌다 한 두 명이 그렇게 하면 직장예절이 그게 뭐냐고 동네 마실 나왔냐고 혼쭐을 내겠지만, 대부분이 다 그렇게 하니 그걸 문화로 인정해야 한다.

 여기엔 특별한 이유가 더 있는데, 여름이 길고 무더워 양말 자체를 거추장스럽게 생각하는 게 첫 번째이고 두 번째 중요한 이유는 하루에 다섯 번 해야 하는 무슬림 기도 때문이다. 기도를 올리기 전에는 우두라고 해서, 손발을 물로 씻는 행위를 반드시 해야 하는데, 이를 위한 우두실이 화장실과 별개로 있을 정도다. 하루에 다섯 번 발을 물로 씻는다고 생각하면, 양말을 신는 것이 얼마나 불편할지 이해가 된다.


[아래 글 말미에 우두실이 소개되어 있음. 겸사겸사 소개]

https://brunch.co.kr/@ragony/36


 나는 무슬림도 아니고, 명색이 조직장인데 체면이 있지~ 하면서 출근 패션으로 한동안 양말에 구두 또는 운동화 패션을 고집을 하다가 큰맘 먹고 맨발에 샌들로 출근해봤는데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 겨울이 와서 발이 시리기 전 까지는 이제 양말 안 신을 생각이다. 다만, 가끔씩 현장 설비들 순시점검을 가야 하니, 양말과 안전화는 사무실에 늘 비치되어 있긴 하다.



[현지화 2]

 파키스탄 남자들은 대부분 수염을 기른다. 콧수염이든 턱수염이든 둘 다 든 어떤 식이로든 수염을 기르는 게 더 일반적이다. 본인의 취향에 따라 콧수염만 깎는 사람, 턱수염만 깎는 사람, 둘 다 기르는 사람 각양각색이지만 둘 다 기르는 쪽이 제일 많은 것 같다. 1/10 정도 비율로 한국 성인 남성처럼 말끔하게 면도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지만, 일반적이지는 않다.

 나도 수염을 기르기 시작한 지 한 달이 조금 넘었다. 콧수염과 턱수염 둘 다 기르는데, 일명 프렌치스타일 이라고 해서 콧수염과 턱수염을 같이 기르되, 턱관절까지는 안 기르고 뒤쪽은 면도하는 스타일로 다듬고 있다. 특별한 이유는 없고, 콧수염과 앞 턱까지는 수염이 빽빽하게 나는데, 뒤쪽으로 갈수록 듬성듬성 나서 별 멋도 안 나고 괜히 지저분해 보여서다.


대충 이런 느낌?


 수염을 기르게 된 이유는 양말을 안 신고 샌들 차림으로 출근하다보니 너무 편해서, 아침마다 면도 안 해도 정말 편하겠다~ 싶어 기른 게 첫 번째 이유이며, 한국식으로 말끔하게 면도하던 내가 현지인처럼 수염을 기르면 현지 직원들에게 보다 친숙할 것 같다 생각한 것이 두 번째 이유다. 면도기, 면도날 사는 것도 아까운데 면도 안 하면 돈이 절약되겠구나 싶기도 했고, 날마다 맨 살에 칼을 안 대니 피부 벨 일 없겠구나 하는 것도 또 다른 이유지만 이건 사실 마이너하다. 결정적 이유는 "귀찮아서". 한국에서 날마다 면도하고 다녔던 이유는 "괜한 구설수에 오르기 싫어서"와 "조직에서 튀고 싶지 않아서"이지, 깔끔한 면도를 즐기던 사람은 아녔다. 한국에서도 휴일이면 면도하던 적이 없었다.




 사실, 수염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다. 언젠가 어떤 브런치 작가님이 여자는 화장 안 하면 직장에서 잔소리하면서 남자는 화장 안 해도 아무 말도 안 하는 현실이 불공평하다고 하신 적이 있었는데... 사실 남자는 화장 대신 날마다 면도한다. 이거, 엄청나게 귀찮고 시간 걸리고 돈 드는 일이고(면도기, 면도날, 면도거품, 애프터 쉐이빙 스킨 로션 등등) 심지어 위험하기까지 하다. 통상 1/10 정도의 확률로 면도하다 피를 보는 것 같다.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면도하는 남자들은 공감하실 듯? 그래서 남자랑 여자랑 공평하다는 것은 아니고, 남자는 남자대로 사회적 압박을 많이 받는다는 소리다.


 자, 그런데 여기서 원초적 질문.


 한국 남자들이 언제부터 면도했나? 내가 아주 어렸을 때도 시골 할아버지들 제외하고 도시에서 사회생활하는 거의 모든 남자들은 면도하고 다녔다. 그런데, 개화기 때 남아있는 근대 초기 한국 사진을 보면 많은 성인 남성들이 수염을 기르고 다녔다. 다들 알다시피, 우리나라는 "신체발부 수지부모"라고 해서 온몸의 작은 털 하나까지 부모가 물려준 것이니 내 몸을 소중히 다루어야 한다는 효행사상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평생 이발도 안 하고 상투 틀고 살던 민족 아닌가. 면도? 가당찮은 소리지. 개화기를 한참 지나 일제 강점기 시절 이후부터는 면도 한 사람들이 자주 보이는 것 같은데, 헤이그 특사처럼 다개국어에 능통하고 배우신 분들도 콧수염 정도는 멋으로 기르고 다녔음을 볼 수 있다.


헤이그 특사 : 이준, 이상설, 이위종 열사. 1907년.


 어쨌든 내가 일일이 과거를 다 확인할 수는 없지만, 개화기 이전 조선시대에는 100% 수염을 길렀고 개화기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면도하는 사람 비중이 확연히 늘다가, 6.25 전쟁을 거치고 미국식 문화가 들어오면서 면도하지 않으면 이상하게 생각하는 문화가 정착된 것 같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한국에서 성인 남성 직장인이라면 거의 무조건 따라야 하는 "깔끔한 면도" 문화가 원래 한국 고유문화가 아니라는 것.


 신체 특정부위에 털이 나는 건 다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조물주가 우리를 완벽하게 설계한 것 같지는 않은데("설계 하자입니다. 고쳐주세요." 편 참조) 그래도 특정부위에 털을 심어 둔 건 뭔가의 목적이 있을 것. 머리칼은 제일 소중한 머리통을 보호하는 목적일 테고 겨드랑이 및 생식기의 털은 피부의 쓸림을 방지하는 목적일 것이다. 털이 응당 나야 할 머리에 털이 빠지면, 발모제 등을 먹어가며 악착같이 지키는 곳 아닌가. 오죽하면 대머리 해결하면 노벨상 감이라는 말이 나오겠는가. 남성들의 콧수염과 턱수염은 왜 날까? 용도는 모르겠지만 멋으로 심어둔 거 아닐까? 어쨌든 내 몸이지만, 내가 심은 거 아니다.


https://brunch.co.kr/@ragony/53


 왜 하필 남성 코 아래, 턱 주변에 나는 털은 한국에서 이다지도 천대를 받나. 여기저기 외국을 다녀봤는데 우리나라만큼 면도에 엄격한 문화도 없다. 중동 및 서아시아는 수염을 기르는 것이 대세이며, 유럽 미국은 깔끔한 면도를 더 쳐주기는 하지만 멋진 수염을 가진 성인 남성들이 드물지 않으며 충분히 멋으로 인정받는다.




 사실, 귀찮아서 길러 본 수염인데, 이거 생각보다 잔손이 많이 간다.


 머리칼 주기적으로 잘라주지 않으면 산발이 되듯이, 수염도 똑같다. 수염 가닥 하나하나가 동일한 속도로 자라지 않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끝을 다듬어줘야 지저분한 느낌이 덜하다. 그리고 특히 콧수염 중에서도 입술 가까이 자라는 수염은 식사 중에 상당히 걸리적거린다. 그래서 콧구멍 바로 아래 자라는 수염은 길게 기르고, 입술 가까이 자라는 수염은 짧게 다듬어서 식사할 때 걸리적거리지 않게 다듬어서 다닌다. 앞서 설명했지만 지저분하게 안 보이려면 턱관절 및 뺨에 듬성듬성 난 수염은 다듬어주어야 한다. 완전 프리스타일로 길러볼 수도 있겠지만, 그건 그거대로 불편함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끝으로 수염을 길러본, 기르는 소감.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인지 진심인지 모르겠지만, 현지인들이 무척 좋아한다. 깔끔하게 한국식으로만 해 다니던 한국인이 점점 현지인들하고 스타일이 동화되어가니 친밀감을 느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이건 내가 수염을 기르는 사실 두 번째 이유이기도 한데, 목적한 바대로 전달되는 것 같아 무척 다행이다. 한국 본사에도 내가 수염을 기르는 것이 알려지긴 했지만, 현지 특수성을 인정해주며 간섭하지 않는 분위기이다. 다만, 어머니는 내가 수염 기르는 것을 여전히 극도로 싫어하신다. ㅡ_ㅡ;;;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 다시 말끔하게 면도하는 생활로 돌아가면 또 꽤나 어색하게 느껴질 것 같다. 피부 색깔이 유독 튀는 외국인 신분이긴 하지만, 현지인들에게 동화되어 살아가는 것도 좋은 경험이니, 당분간은 수염 기르는 조직장이 되어서 살아볼테다. 뭐 어때. 내 몸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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