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정전"은 이 나라에서 일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어쩌다 일어나는 돌발적인 상황을 뜻하는 Power Out, Black Out, Power Cut 이란 용어 대신 "Load Shedding"이라는 용어를 쓴다. 정전사고가 아니라, 계획적인 부하분배라는 뜻이니 너무 불만갖지 말아라~ 라고 하는 뉘앙스가 깔려있다 하겠다. 연관 뉴스 몇 개를 추려본다.
정전 시간은 지역에 따라 좀 다른데, 상대적으로 시골 지역은 최대 18시간, 도시 지역은 6~12시간 정도의 Load Shedding이 날마다 일어난다. Load Shedding 시간을 예고하기도 하지만, 불시 Power Cut도 부지기수로 일어나니 살다가 전기가 나가도 원래 그러려니 한다. 도시지역의 Load Shedding이 더 짧은 이유는 도시 필수 기능을 유지하기 위한 고육책이기도 하거니와, 상대적으로 전기요금이 비싼 동네일수록 전력원가 회수율이 높은 경제적 이유도 있다고. 이 나라 전력공급은 정부의 수전력부 산하 국립송전공사(NTDC)가 500kV, 220kV 변전소 및 고압 송전 업무를, 각 주요 도시에 소재한 9개의 배전회사가 각 지역의 배전(11kV) 업무를 담당하고 있으며, 지역마다 시간마다 전기요금이 차등 적용되는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런 까닭에, 전력과 연관된 몇 특징들이 보이는데,
1. 데스크탑을 쓰지 않는다. UPS(비상전원공급장치)가 장착된 서버를 제외하곤 어딜가도 데스크탑 PC를 본 적이 없다. 뭣 좀 하려고 하면 전기가 나가버리는데, 통째로 업무가 마비되는 데스크탑을 쓸 수 있겠나. 내가 방문했던 모든 회사의 기본 업무시스템은 전부 랩탑 PC였다. 당연히 내 업무 PC도 랩탑이다.
2. 중요 건물이나, 잘 사는 집에는 마당 한 켠에 디젤 발전기가 빠지지 않고 있다. 정전이 되었다 하면 여기저기서 우렁찬 디젤엔진 시동소리가 들린다.
3. 세탁기 등 주요 가전에 "Auto Restart"기능이 있다. 처음에 저게 뭐하는 기능인가 했는데, 세탁기가 돌아가다 말고 정전이 되어서 가동이 멈추면 그 시점을 기억하고 있다가, 전력 공급이 재개되면 멈춘 시점부터 자동으로 재가동된다. 자랑스런 우리나라 1등 가전회사인 LG에서도 이 나라 맞춤형으로 "Auto Restart" 기능을 넣어서 판매하고 있다.
4. 신호등을 찾아보기가 매우 어렵다. 수도인 이슬라마바드 정도에 가야 중심부에서 아주 가끔 신호등을 찾아볼 수 있고, 변두리로 나가면 신호등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루에 18시간씩 정전이 되는데, 신호등이 설치되어본들 무슨 소용이겠나...
정전이 이렇게 잦은데, 일반 가정에서 냉장고는 어떻게 쓰냐고 물어보니, 전력이 가동되는 시간에 최대한 냉기를 생성해두었다가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시간에는 아예 열지 않으면서 달래가며 쓰면 쓸만하단다. 가정이야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까페나 음식점 등에서는 정전되는 시간에는 얼음을 블렌더에 갈아서 만드는 스무디 같은 메뉴는 정전시간에는 주문 자체가 안 된다.
2021년 기준 파키스탄의 발전설비 용량은 37GW이고, 대한민국 설비용량은 129GW로 한국이 약 3.5배 더 많은 발전설비용량을 보유하고 있다. 파키스탄은 총 국토면적이 약 80만㎢으로 대한민국(약 10만㎢, 남한 한정)으로 8배 정도 더 넓고, 인구는 2.2억명으로 5천만명이 사는 남한보다 4배 이상 더 많지만 발전설비는 남한 대비 30%도 보유하고 있지 않다. 인구 대비로 직접 비교하자면 인당 발전설비 용량이 남한 대비 채 10%도 안 되는 셈.
파키스탄의 주 발전원은 천연가스(32%)이며, 석탄과 석유를 포함한 전체 화력발전 비중은 61% 수준으로 한국과 유사하며, 북부지방 산지가 많은 지형적 특성을 활용하여 수력발전 비중이 전체의 26% 수준으로 높은 편이다. 발전용량에 비해 송배전 용량은 22GW정도가 한계로, 발전량 자체보다 송배전망 낙후와 부족에 의한 전력공급 불가 문제가 고질적 문제이다. 모든 발전기가 다 돌아가도 전기를 보낼 길(=송배전망)이 없어 보낼 수 없다는 뜻. 차가 아무리 많으면 뭐하나, 길이 없는데.
근래의 정전 문제는 과거보다 훨씬 심각한데, 일전에 잠깐 언급했지만, 요즘 남아시아 지역 전체 경제가 엉망이기 때문이다. 화력발전 비중이 높은 파키스탄이 코로나19의 장기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의 국제 악재로 외화가 고갈되어 연료 수입을 못 해서 멀쩡한 발전기를 놀리고 있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며, 유례 없는 폭염이 지속되어 전력수요가 급증한 이유도 크다.
당시 순환정전은 지역별로 20~30분 씩 예고 없이 돌아가며 전기를 끊는 방식이었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엘리베이터에 갇히고, 상점들은 영업을 할 수 없었으며, 산소공급이 끊긴 수족관 물고기는 죽어나가는 등 후폭풍이 거셌다.
전력업계 종사하는 사람으로 지금 와서 말하지만, 당시에 전력거래소에서 순환정전을 결정하지 않았다면, 국가 전체가 Black Out(광역 동시정전)에 빠지고도 남을 상황이었다. 한번 광역 Black Out이 발생하면, 이것을 전국 단위로 전력공급을 재개하는 것에는 짧아도 열흘 길게는 20여 일 이상이 걸리는 엄청난 일이다. 전력이라는 에너지는 공급과 수요가 0.001도 차이가 없이 완벽히 들어맞아야 하는데 전국의 발전소를 동시에 켜면서 전국의 부하도 동시에 켜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걸 차근차근 지역단위로 쪼개서 하나하나 맞춰가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 저렇게 긴 시간이 걸리는 이유다. 국민 불편을 야기한 것은 수요공급예측을 잘못한 누군가의 잘못이긴 하지만, 광역 Black Out을 막은 순환정전이라는 신의 한 수는 훈장을 줘도 아깝지 않을 결정이었는데, 당시 전력공급계획을 담당하고 실행했던 보직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중징계를 피할 수 없었다. 정부가 국민감정만 고려해서 설명 없이 희생양만 찾은 격.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어쨌든 오늘은, "24시간 전기걱정 없는 대한민국 좋은나라"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당연히 물처럼, 공기처럼, 당연히 24시간 공급되는 전기. 이거, 절대 당연한 게 아니다. 비단 파키스탄뿐만 아니라 다수의 저개발국가는 전력공급 서비스를 여전히 안정적으로 받고 있지 못하며 사실 내가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집집마다 비상용 양초가 꼭 있었다. 정전 때 양초로 불 밝히다가 불 내먹는 일도 잦았고.
얼마 전에 한국 전기요금이 살짝 인상되었다. 가뜩이나 고물가인데 전기요금 올랐다고 말들이 참 많다. 나는 한전 직원은 아니지만 동종업계 종사자로서 좀 갑갑한 마음이 든다. 창사 이래 최대 적자를 내고 있는 한전 욕하는 사람들이 많은 요즘이지만, 국제 에너지 가격(석탄, 기름, LNG 등)이 급등하는데 정말 쥐꼬리만큼 올리는 전력요금 구조로 적자가 안 나면 더 이상한 일이다. 전기요금 안 올리고 버티고 버티다 한전이 통째 망하면, 수입할 연료비 지급할 돈도 없고 발전기도 못 돌리면 24시간 안정적 전기공급 서비스도 없다. 전기는 공짜 서비스가 아니며, 쓴 만큼 지불하는 상품이다. 그래서 "전기세"란 표현도 틀렸다. 당연히 "전기요금"이지. 그리고 고마운 24시간 전력 서비스 이면에는 한여름에도 낮이나 밤이나 더 뜨거운 전력설비를 다루며 고군분투하는 업계 사람들의 피나는 노력이 있기 때문이란 걸 가끔은 인지해 주셨으면 좋겠다.
외국에 나오면 다 애국자가 된다지만, 열악한 나라에서 살다 보니 "위대한 나라 대한민국"이라는 마음이 점점 더 커진다. 여기 있는 동안 눈높이가 많이 낮아져서, 귀국하게 되면 정말 매사에 감사하며 살 수 있을 것 같다. 수돗물이 맑으면 "우와~~~", 정전이 안 되어도 "우와~~~~"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