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5.30
중국 속담 중에 "불행은 쌍으로 온다."는 말이 있다.
우리나라 속담에도 있지." 엎친 데 덮친 격."
수술이 잘 끝나 언어치료를 하고 있는 그이와 매일 병원놀이 중이다.
병원 구석구석 투어도 하고, 편의점에서 제일 맛난 간식도 찾고,
병원밥이 싫어 그이 핑계 대고 맛난 음식도 사 오고,
결혼한 이래 24시간 붙어서 지낸 건 처음이니 이건 신혼이네.
결혼해서 시어른들과 같이 살았고, 주말부부로 지낸 시간이 많아 둘이서 지내본 적은 거의 없어
둘이서만 좀 살아보는 게 소원이라 했는데 이렇게 소원을 이뤄주나? 하며 웃었다.
2014년 나에게 온 유방암은 아주 가벼워서, 수술하고 방사선치료만 29번 하고 약만 먹으면 되니
그 무서운 항암도 안 하고, 머리카락은 빠지지 않아 감사하게 5년을 지냈다.
5년간 6개월에 한 번씩 하는 정기검진 마지막 회차. 이틀에 걸쳐 많이도 검사했다.
병원에 그이 혼자 놔두고 가는 게 좀 마음에 걸리지만 검진에 대한 결과를 들으러 가야 했기에
얼른 다녀오겠다고 말하고, 세브란스로 향했다.
5년 내내 혼자 다녀서 나의 보호자는 나라고 생각했다.
진료 차례가 되어 들어갔는데 심장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리는 거 같다.
사진만 한참 들여다보던 의사 선생님이
" 모양이 좋지 않은 혹이 MRI로 보여요. 조직검사를 해봐야겠어요. 결과는 일주일 뒤에 나와요."
조직검사하자는 말에 낙담과 실망과 걱정이 한꺼번에 덮친 듯 말도 안 나온다.
그 잠깐의 찰나에 앞 날에 대한 걱정이 쓰나미처럼 몰려왔기 때문이다.
'그이는 어쩌지?'
'어린 윤서는 어쩌지?'
'어머니께 뭐라고 하지?'
지하철을 타고 그이가 있는 성모병원으로 오면서 눈물이 줄줄 흐르고 눈앞이 깜깜했다.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내 고난의 범위가 어디까지일까?
2000년 1월 임신 7개월 차에 유산을 했었다.
나중에서야 알았지만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거였다.
엄청 힘들다고 울고 있을 때 친정 아빠가 내게 건넨 말은
"네 등에 있는 현재의 십자가가 무거워서 이 힘든 걸 지우고 싶다면 방법은 딱 한 가지,
더 무거운 십자가가 얹힐 때다."
라고 해서 원망스럽고 내게 올 고통들이 무서웠다. 산후 우울증은 친정아빠의 위암발병으로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큰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오가야 했었다.
그때 난 30대가 넘었는데 내 앞날은 깜깜해 보였고. 상실감과 우울감에 더없이 힘들다 생각했었다.
그땐 세상에서 내가 제일 힘든 것만 같았다. 주변 돌아볼 여유조차 없이 내 일기장은 참 암울했으니까.
그래도 또 살아지고, 살아내고 씩씩하게 잘 통과해서
50대가 되어 어떤 일이든 잘 대처할 수 있을 거 같다고 생각했는데.....
남편은 뇌종양 수술 마치고, 방사선 치료와 항암을 기다리는 중이라 보호자가 붙어 있어야만 하는데
나도 같이 다시 암환자가 되어야 하다니. 남편에게 뭐라고 말하지?
병원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이가 전화를 계속하는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불안할 그이를 안심시켜 줄 말도 생각이 안 나는데.
병원에 도착도 하기 전에 어머니에게 전화가 와서 괜찮다고 말하고 싶은데
이미 나는 울고 있었다. 아니. 울음이 멈춰지질 않았다.
신혼 놀이 하러 병원에 들어가야 하는데 지하철 역에서 쭈그려 앉아 한참을 울었다.
내 고난의 범위는 어디까지인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