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을 위한 시금치 수프

가장 보통의 레시피 - 소박한 식탁 위 발칙한 잡담들

by 웅숭깊은 라쌤

상상한다.

지쳐 버린 당신이 퇴근하자마자 소파에 몸을 축 늘어뜨린다. 외투를 벗지도 못한 채 그렇게 눈을 감고 피로에서 벗어나고자 애쓰는 당신. 허나 쉽사리 당신을 놔주지 않는다. 몸은 무겁고, 그보다 더 무겁게 당신을 짓누르는 지난 하루가 당신을 넘어 나까지도 괴롭히기 시작한다. 미소가 사라진 얼굴을 바라보는 건 내게도, 진한 고통이 되니까.

그리하여 난, 견딜 수 없던 난, 냉장고 가장 아래 칸 모여있는 채소들 사이에서 시금치 한 단과 양파 한 개를 꺼내 든다. 위쪽 날개 칸에서는 다진 마늘, 버터, 우유와 생크림, 그리고 파르메산 치즈 가루를 함께 챙긴다. 양팔 가득 담은 재료를 아일랜드에 늘어놓고 차근차근 재료 손질에 돌입하는 나. 지친 당신의 속을 달래줄 영혼을 위한 시금치 수프, 지금 바로 시작합니다!


버터에 다진 마늘, 양파를 볶다가 깨끗이 세척한 시금치를 투하! 숨이 죽을 때까지 야무지게 볶아준다. 볶은 재료들은 물 한 컵과 함께 믹서기에 갈아주고, 예쁜 녹색 물이 되면 다시 팬에 넣고 우유, 생크림과 함께 끓여준다. 걸쭉한 농도를 위해 밀가루를 버터로 볶은 루 roux를 만들기도 하는데, 그냥 밀가루를 물에 풀어 넣어주는 것도 방법이다. 간을 맞출 땐 소금을 뿌리면 간단하긴 하지만, 파르메산 치즈 가루를 뿌려주면 더 진한 풍미를 느낄 수 있다. 아, 마지막엔 느낌 있게 파슬리와 후추후추!

시금치 수프.jpg 녹색 쿼터제를 생각해서, 시금치 수프 어때요?


위로를 원하는 지구인들이 자꾸만 늘어나는 요즘이다. 왜들 그리 힘들게 살고 있는지, 지친 영혼을 달래줄 소중한 한 마디를 갈구하고, 또 갈구한다. 그래서 나도, 당신을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에 얼른 위로의 원칙을 알아보았다. 위로 에세이가 넘쳐나는 요즘, 전국 각지의 위로 전문가들이 그 나름의 방법을 제시해주고 있었으므로 이를 찾아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위로의 기본은 경청과 공감, 반응과 지지라는 말로 압축되고 있었다. 우선은 잘 듣고, ‘그랬구나’라고 하며 고개를 끄덕여주고, 마지막엔 ‘난 네 편이야’라고 말해주면 된다고 한다. 뭐야, 이렇게 쉬운 거였어? 그런데 이 쉬운 걸, 나는 왜 잘해 낼 자신이 없지?

누군가는 ‘너 T야?’라고 물을 수 있겠으나 나는 분명 공감 능력이 탁월한 F임이 확실하다. 다만 말, 말하기에 자신이 없다. 어떤 해결책이나 조언을 전달하기엔 나라는 존재는 터무니없이 부족하고, 혹여나 잘못된 단어 하나로 인해 당신의 감정을 건드릴까 두렵다. 솔직히 말하면 당신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할까도 두렵고 더 솔직해지자면, 나 역시 삶의 무게를 감당하기 힘이 들기에 누군가의 감정 쓰레기통이 될 자신도 없다. 그래서 고심 끝에 결심했다. 말없이 당신을 안아주고, 슬며시 당신의 영혼을 위한 시금치 수프를 끓이기로, 그렇게.

소울푸드라는 말은 1960년대 미국 흑인들의 문화에 ‘soul’이라는 말을 붙이는 게 유행하면서 등장한 표현이다. 흑인들의 식생활이 소울푸드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던 것. 그런데 이 소울푸드라는 말이 우리나라에서는 영혼을 흔들 만큼 아주 인상적인 음식 혹은 개개인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음식이라는 의미로 변용되어 등장하였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소울푸드라고 하면 김치찌개, 된장찌개, 떡볶이 따위를 먼저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결국 국립국어원에서는 이 소울푸드라는 단어를 ‘위안 음식’이라는 순화어로 다듬어냈다. 위안 음식, 참 그럴듯한 말이다. 말이긴 한데, 난 사실 위안 음식을 만들려던 게 아니다. 내가 당신의, 위안이 되고 싶었을 뿐.


다시 상상한다.

지쳐 버린 당신이 퇴근하자마자 소파에 몸을 축 늘어뜨린다. 외투를 벗지도 못한 채 그렇게 눈을 감고 피로에서 벗어나고자 애쓰는 당신. 허나 쉽사리 당신을 놔주지 않는다. 몸은 무겁고, 그보다 더 무겁게 당신을 짓누르는 지난 하루가 당신을 넘어 나까지도 괴롭히기 시작한다. 미소가 사라진 얼굴을 바라보는 건 내게도, 진한 고통이 되니까.

그리하여 난, 시금치 수프를 끓여 차려놓고 가만히 당신을 끌어안는다. 천천히 외투를 벗겨주고, 당신 손에 은빛 스푼을 쥐여준다. 당신은 몇 숟갈 뜬 뒤 얼굴색이 환해지고, 지켜보고 있던 내게 묻는다.


“그런데 왜 하필 시금치야?”

“그건…… 그 아저씨가 그러더라고. 힘이 필요할 때, 항상 시금치를 찾아.”

“아저씨? 누구?”

“뽀…… 뽀빠이 아저씨.”


당신이 뽀빠이 아저씨를 모르든, 듣자마자 이상용 아저씨를 떠올리든 그건 상관이 없다. 그저 올리브, 당신에겐 당신을 지킬 뽀빠이 아저씨가 곁에 있다는 것만 기억하면 그걸로 충분하다. 당신을 절대 아프게 두지 않을 당신만의 히어로, 내가 있다는 것을.

영혼을 위한 시금치 수프.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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