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 일기>이면서 <1주 일기>이기도 합니다.
멜버른에는 수많은 갤러리와 미술관들이 있다. 단 3일의 시간이 주어진, 그것도 온전하지 않은 3일이 주어진 나에게는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때다.
멜버른에서 선택한 미술관은 빅토리아 내셔널 갤러리이다. 1861년에 설립된 이곳은 호주에서 가장 오래된 미술관이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각국의 75,000점 이상의 작품을 무료로 감상할 수 있다니! 이 미술관은 또 어떤 방식으로 내게 감흥을 줄까.
Princes Bridge를 건너고 St Kilda Road를 따라 걷는다. 연둣빛으로 물든 수많은 나무들에게서 끝없는 환영의 인사를 받으며 도착한 미술관. 정문 양 옆으로는 원형 계단 형식으로 구성된 분수에서 고요히 흘러내리는 물이. 입구에도 물이 흘러내리는 벽이 있다. 촉촉한 기운으로 방문객들을 맞이한다.
14세기 영국의 스테인드 글라스 작품을 시작으로 18세기 상아로 조각한 예수 그리스도 상, 영국계 아일랜드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의 우울한 분위기가 흘러나오는 인체 사진까지. 다양한 화가, 다양한 방식으로 새겨진 작품들의 향연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1시간쯤 관람했을까. 슬슬 지쳐가는 찰나, 내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강렬한 방이 등장했다. 온 벽이 빨간색으로 뒤덮인 방이다. 이곳에는 바닥부터 천장에 닿기까지 수많은 작품들이 불규칙하게 전시되어 있다. 방 곳곳에는 다양한 조각상들과 소파가 배치되어 있고.
원색의 강렬함 때문일까 수많은 작품들 때문일까.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순식간에 압도당한다는 느낌이 이런 것이구나. 작품의 크기도 다양하다. 손바닥만 한 작품부터 내 몸의 5배는 되는 대형 작품까지. 분명 불규칙하게 전시되어 있는데 이상하게 마음 한편에는 편안하고 안락한 감정이 퍼진다.
이 방에서 가장 내 눈길을 사로잡는 작품은 한 여성의 누드화다. 작품의 제목도, 이 그림을 그린 작가도 누구인지 안 적혀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검은색 긴 머리. 한 손을 볼에 가져다 댄 채 약간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벽에 기댄 채 정면을 응시하는 여성의 눈빛은 몽환적이다. 신화 속에 나올 것만 같은 여신처럼 보이기도 한다.
Jules Lefebvre
그림 왼쪽 상단에는 연하게 작가의 이름으로 보이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Jules LeFebvre」. 프랑스의 교육자이자 화가였던 그는 1836년에 태어났다. 작업 초기에는 역사나 전통을 주제로 그림을 그렸지만 그의 인생 후반부에는 여성 누드만을 전문적으로 그린다.
위 작품은 그의 1872년 파리 살롱전에서 처음 전시된 「The Grasshopper」이다. 우화 「개미와 베짱이」를 상징적으로 나타낸 작품이다. 여름동안 노래하며 논 베짱이와 열심히 일한 개미가 주인공으로 '현재의 즐거움만을 추구하지 말고 성실히 미래를 준비하는 것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이야기이다. 받은 퇴직금을 몽땅 쓰고 갈 계획인 내가 괜스레 혼나는 느낌이다.
그림 속의 여성이 베짱이인지 개미인지 판단할 수 없다. 그녀의 표정이 무엇을 말하는지 나는 잘 모르겠으니까. 개미처럼 사는 것도, 베짱이처럼 사는 것도 본인의 선택이다. 사는 방법에 정답이 있는 건 아니니까. 삶의 방식에 옳고 그름을 내 멋대로 판단할 수 없다. 다만 본인의 선택에 대해서 책임만 지면 된다고 생각한다.
개미인지 베짱이인지 아니면 그들을 바라보는 제삼자인지 모를 그녀는 무엇을 바라보며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단지 지금은 그것이 궁금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