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일 없이 지나가는 일상 이야기이다.
‘선은 반드시 승리한다’는 믿음은 동화 속에나 존재합니다.
학교 교과서에서는 결코 알려주지 않았던 현실입니다.
우리는 성인이 되고 그 앞에서 처참히 부서집니다.
정직했던 노력은 쉽게 무시당하고 순수한 의도는 조롱거리가 됩니다.
끝까지 바른 길을 걸었던 이들은 결국 무대 뒤로 퇴장하거나 서서히 잊히며 사라지곤 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죽음은 단지 생명의 끝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상의 붕괴, 믿음의 소멸, 그리고 잊힘입니다.
나는 그 속에서 살아남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모든 것을 목격하고 방관하며 침묵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좋은 녀석들은 왜 그렇게 쉽게 사라지는 걸까요?
우리는 참고 인내하는 것이 미덕이라 배웠습니다.
착하게 살고 배려하고 인내하는 삶이 어른스러운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 미덕에 종종 가혹한 값을 치르게 합니다.
선의를 무한정 베풀고 이해심을 발휘하며 불편함을 감수라는 순간들이 반복될수록 어떤 이는 그것을 존중이 아닌 만만함으로 해석하고 함부로 대해도 되는 대상으로 여기기 시작합니다.
당신의 친절은 당연한 권리가 되고 당신의 인내는 이용할만한 약점이 됩니다.
한 번은 이해, 두 번은 배려, 세 번은 호구라는 말은 농담이 아닙니다.
세상은 착한 사람들을 착취하고 그들의 순진함을 발판 삼아 자신의 이익을 당연시합니다.
결국 좋은 사람들은 부당함에 ‘아니요’라고 말하는 법을 배우지 못해 무너지는 것 같습니다.
무언가 잘 못 되었다고 느껴질 때 우리는 위를 바라봅니다.
높은 자리에 있는 이들은 정말 정직하고 착하기만 해서 그 자리에 올랐을까요?
현실은 다릅니다. 냉정하게 돌아보면 위로 향하는 길은 생각보다 훨씬 치열합니다.
그곳에서는 도덕적인 판단이 흐려지고 결정은 차가워집니다.
성공이라는 달콤함을 추구하면 어느새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본래의 선량함을 훼손하기 마련입니다.
그저 효율과 생존이라는 명분 아래 삶의 원칙들이 희미해지는 겁니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가 흔히 아는 냉혹한 모습을 띠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쩌면 그들 스스로도 끝없는 경쟁과 비정함 속에서 냉소적이 되어버린 걸지도 모릅니다.
겉으로는 강해 보이지만 내면의 두려움을 감춘 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시스템이 만든 결과물이거나 그 안에서 스스로 변해버린 것일 뿐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성공과 유능함을 부르짖고 특정 잘난 사람들을 영웅처럼 떠받듭니다.
그러나 노자는 일찍이 현명한 자를 숭상하지 않아야 백성들이 다투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개혁적인 지혜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특정 현명함이나 재능을 과도하게 추종하고 숭배하면 너도나도 그들처럼 되려고 경쟁하고 진심보다는 가식적인 모습으로 자신을 포장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진짜보다 보이는 모습에 집착하게 되며, 그 결과는 경쟁과 위선, 그리고 지쳐나가는 본인 자신입니다.
사회가 특정한 가치나 인물을 지나치게 띄울 때, 그 아래에서는 끊임없는 투쟁과 잔인한 경쟁이 벌어집니다.
억지로 애쓰고 발버둥 치는 대신 자연스러운 흐름을 따르는 것이 단순한 체념을 넘어서 노자의 시대를 관통하는 통찰입니다.
무리한 욕심과 타인의 기준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덜 다치고 더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하면 된다’는 의지는 종종 무모한 질주를 부릅니다. 그 결과는 통제할 수 없는 좌절입니다.
그러나 ‘되면 한다’는 다릅니다.
이것은 패배가 아니라 현실에 대한 이해이고 자신을 지키기 위한 전략입니다.
‘되면 한다’는 삶은 내가 바꿀 수 없는 외부의 조건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가능한 것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마치 강물이 흐름에 따라 낮은 곳으로 나아가며 결국 바다에 이르는 말입니다.
이것은 착함을 버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착함이 약점이 되지 않도록 경계를 세우고 부당함에 단호히 거절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라는 뜻입니다.
때로는 떨어지는 절벽에서 손을 놓을 수 있는 결단이 내면의 단단함을 만듭니다.
세상은 당신의 선량함을 이용하려는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선량함을 지혜로 바꾼다면 당신은 ‘좌절하지 않는 좋은 녀석’으로, 또는 ‘냉혹한 현실을 버텨낸 진정한 생존자’가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