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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혹등고래 Oct 26. 2024

'자기결정권'을 연구하는 사람

사회적 시력, 자기결정권은 몇?

안과에서 시력을 쟀다. 오른쪽과 왼쪽 각각 1.0과 0.8이 나왔다. 1.2였던 시각이 1.0대로 내려오는 것은 당연지사다. 노트북이나 핸드폰 화면을 자주보니 말이다. 인간에게는 신체적인 시력 뿐 아니라 정신적인 시력도 있다고 생각하는 바다. 신체적인 시력 처럼, 정신적인 시력 또한 멀리 보지 못하면 잃어 간다. 개인적으로 진단하기론 우리 사회는 자기결정권에 대한 시각이 많이 흐려진 것 같다. 자기결정권에 대한 시력이 떨어졌다는 것은 표현하지 않는 사회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표적인 예로 한 때 사회에서 많이 거론 되었던 '결정 장애' 흐름이다. '장애'라는 표현으로 분류를 시도하는 것 같았지만, 이것은 각설하고.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결정장애'를 커밍아웃 한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의사표현을 하지 못해 왔다는 것을 시사한다고 보았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의사표현은 핵심가치 중 하나이며, 의사표현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자기결정권이 이행된다는 의미다. 그러나 의사를 표현하면 안되는 사회가 의사를 표현할 수 없게 만들어 너도나도 '결정장애'를 호소하는 사회가 되어 버린 건 아닐까 싶다. 이미 결정된 것에 대한 의사표현 할 수 있는 형식은 있어도, 그 의사표현이 논의되거나 협의점을 도출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의사표현을 할 수 있는 사회가 아닌 것이다. 그러한 문화가 만연한 사회에 익숙해지다 보니 점심시간에 어떤 음식을 먹고 싶은지 조차, 내 친구에게서 고마운 마음이나, 서운한 감정을 표현하는데도 서툰 개개인들이 많아진게 아닐까 싶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활발하게 자기결정권이 논의 되는 분야 중 하나는 성적 자기결정권이다. 사실 성적 자기결정권 외에 자기결정권이 적극적으로 다뤄지는 분야가 없는 것 같긴 하다. 하지만 그마저도 성적 자기결정권을 그저 '성관계를 맺고 싶다'는 주장으로 치부한다. 그러나 성적 자기결정권은 '성관계를 맺고 싶다'는 요구로만 보는 것은 인간 삶에 미치는 사회구조와 정책구조에 대한 과제를 개인의 욕구 문제로 축소 시키는 것과 같다. 이는 생애주기적인 영역에서 다뤄져야 하는 사회정책 논의가 개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양상을 보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성적 자기결정권이 '성관계를 맺겠다는 표현'으로 논의 되는 것도 문제며, 성관계를 하겠다는 개인의 의사를 부적절한 행위로 치부하는 것도 문제다. 먼저, 누군가와 성관계를 하고 싶다는 개인적인 욕구와 요구는 부적절하거나 금기시 되어야 하는 사회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그냥 개인의 의사일 뿐 이를 국가에서 개입 및 통제하는 것은 지나치다. 성적 자기결정권은 성관계만을 포함하지 않는다. 예를들어 결혼을 할지, 미혼으로 살지, 혹은 아이를 낳을지, 낳지 않을지, 입양을 할지, 아닐지를 시작으로 생애주기와 관련된 개인의 선택들로 꾸려가는 삶의 전반을 포괄하는 권리다. 내 선택으로 불이익을 받거나, 피해를 받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정책논의에서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정책은 성적 자기결정권을 '성관계'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성'은 여전히 생물학적인 측면에서 가해-피해 논의만 겨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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