흠집이 어때서
추석 때 사다 둔 과일들이 이제야 바닥이 보인다. 추석 직전에 태풍이 연달아 오고 추석 대목 특수까지 겹쳐서 과일 값이 비쌌다. 그럼에도 나는 욕심을 냈다. 태풍에 과일이 떨어지면, 궂은 날씨에 맛이 빠지면, 상태 좋은 과일이 다 팔리고 나면, 추석 이후엔 맛있는 과일을 구하기가 어려우니깐.
과일 가게에서 포도 한 박스, 감 한 박스, 사과 한 박스, 배 몇만 원 치를 샀다. 든든했다. 맛있는 과일을 오래 먹을 생각에 행복했다.
하지만 내 걱정과 달리 추석 이후에도 맛있는 과일은 계속 나왔고, 오히려 사과나 배는 훨씬 맛이 좋았다. 포도와 감은 금세 다 먹었지만 사과와 배가 손에 잡히질 않았다. 냉장고에서 한 달을 묵혔다.
이 한 달 동안 과일을 안 먹었느냐. 그건 아니다. 계속 사다 먹었다. 사과도 사 먹었다. 묵힌 사과와 배는 고기 양념할 때와 과일 사는 걸 깜박했을 때만 꺼냈다.
과일에 욕심이 많다. 옷 같은 건 없으면 없는 대로 입으면 되는데, 과일은 그렇지가 못하다. 과일이 없으면 불안하고, 맛있는 과일을 먹으면 곧장 다시 사러 가서 많이 사둬야 마음이 편하다.
과일에 집착하는 나, 정상인가요. 그래도 요즘은 예전보다 집착이 줄었다. 과일은 한 철이니까 지나가 버리면 더 못 먹는다는 생각이 강하다.
며칠 전에 이웃이 시가 동네 과수원에서 사과를 받아왔다며 나눠줬다. 흠이 있어서 팔 수 없어서 이웃들에게 나눠준 게 우리 집까지 온 것이다. 흠집 있는 부분은 도려내고 먹어보니 추석 전에 사둔 과일보다 훨씬 맛있었다. 흠집이 있음에도 더 맛있는 이유는 뭘까? 품종 차이가 중요한 이유겠지만 신선해서 맛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보니 쫌 그렇다. 욕심부려서 나 혼자 맛있는 과일 먹겠다고 묵혀두고 먹는 것, 이기적이다. 미술 작품을 지하금고에 보관하는 부자들이 생각난다. 정말 나쁘네. 생각해보면 단점이 줄줄이인데…. 혼자 차지하려고 하면 공간 마련도 걱정이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도 어렵고, 있는 것들을 잘 보관하기 위해 힘을 써야 하니까 좋을 게 하나도 없다.
반대로 흠집이 있어도 이웃들과 나눠 먹으며 정을 쌓고 자원을 낭비하지 않으면 세상에 도움이 된다. 이웃과 유대감을 만들고 가공식품 등으로 활용할 수 있다. 한철이라는 생각, 유한성에 대한 집착을 버리면 가능성이 생겨나는 것이다. 더 넓게 봐야겠다. 자원은 유한한 게 맞지만, 있는 것들을 소유하지 않으면 새로운 길이 열린다.
과일 구매에 대한 나의 입장도 변했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먹기로 한다. 흠집 없는 것을 찾아 고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