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손님

비의 향연

by Bora

나에게 예고 없이 찾아오는 손님이 있다.

그는 종종 중요한 일을 하고 있을 때 찾아오기도 하는데 그럴 때는 가끔은 난감하기도 하다.

어느 날 우리 부부는 영국에서 오신 신사 분과 함께 인도인들이 모여 사는 동네에 간 적이 있다. 지금은 없어진 나꾸마트라는 마켓에 잠시 들렸다.

우리 부부가 케냐에 와서 생긴 버릇이 하나 있는데 마트를 가기 전에 구매할 품목을 미리 꼼꼼히 적는다. 마트에 들어오자마자 물건을 신속하게 구입하고 최대 한 빨리 빠져나오는 것이다. 지금은 조급했던 마음이 많이 느긋해졌지만 우리의 습관대로 신사와 물건을 신속하게 구매했다. 쇼핑몰에서 테러 사건이 일어난 후부터 더욱 그랬던 것 같다. 그날도 쇼핑 후 몰을 부지런히 빠져나오고 있었다.

손님은 내가 있는 곳을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모르겠다. 남편과 신사는 갑자기 찾아온 그를 보며 당혹스러워했다. 50대 중반이었던 신사는 소녀처럼 웃는 나와 그를 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나는 신사의 눈길에는 아랑곳없이 손님과 눈인사를 나누며 두 손을 꼭 잡고 주차장을 달려 차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달리는 창 문 너머로 무지개가 피어올랐다. 나와 그를 질투하듯...


내가 손님과 절친이 된 곳은 나의 두 번째 고향이 된 케냐다. 지금 생각해 보니 이 친구는 나에게 늘 ‘기분 좋음’이라는 선물을 주었다. 사실 선물이라는 것은 늘 받는 이에게는 크든 적든 기분을 좋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지 않은가? 기분 좋음이란 나만 알 수 있는 향기가 그에게 있기 때문이다. 이 향기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향수를 불러일으키곤 한다. 중학교 3학년쯤으로 기억한다.

그때쯤 나는 고전, 만화책, 소설, 중. 고 학생들이 즐겨 읽던 하이틴 로맨스라는 책뿐 아니라 눈에 보이는 책은 모두 읽기를 좋아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공부하기를 좋아했거나 잘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유년기를 산 밑 외딴집에서 보냈던 나는 담이 없던 뒷문을 열면 과일나무가 가득한 산과 마주 볼 수 있었고, 안방 문을 열면 확 뒤인 마당과 건너편 복숭아 과수원을 볼 수 있었다. 비가 올 때나 눈이 올 때도 마루 앞에서 노래를 흥얼거리며 환상적인 자연을 누릴 수 있었다. 우리 가족은 내가 13살이 되던 봄에 조금은 복잡한 동네 한가운데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새로운 집은 외딴집과 는 달리 양옆으로 집이 있었고 사람이나 차와 오토바이, 자전거가 수시로 집 주위 다녔다.

사춘기가 막 시작하던 나는 유난히 부끄러움을 많이 타기 시작하면서 선택한 것은 집 안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책 읽는 것이었다.


손님이 나에게 묘한 향기를 갖고 온 날은 공휴일이었고 가을날이었다.

나는 마루 카펫 위에 배를 깔고 베개에 얼굴을 얹고 책을 읽고 있었다. 책을 읽다 보니 온 몸이 노곤해지기 시작했다. 앞마당에 빨간 고추가 가을 햇살에 꾸듯 꾸듯 말라가고 고추잠자리는 하늘을 가르며 이리저리 날고 있었고 화단에는 분꽃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있었다. 이 꽃은 신기하게도 엄지와 검지로 가운데를 누르면 ''하며 터지는 소리가 났다. 나는 졸린 눈으로 고추잠자리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를 세다가 스르륵 잠이 들었다. 깜박 단잠에 들었던 나의 귓가에 어디선가 ‘우르르 쾅’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잠에서 깬 나는 맨발로 다급히 계단을 내려와 고추가 널려 있던 멍석을 반으로 접어 대문 가까이 처마 밑으로 끌어다 놓았다.

서쪽 하늘부터 시작하던 소나기가 안마당에 잠시 머물다 가며 미쳐 걷지 못한 옷을 후줄근하게 적셨다. 가을 햇살에 뜨겁게 달궈진 콘크리트 바닥에 빗물이 금세 스며들었다.

멍하니 소나기가 멈추길 만 기다리던 순간 나의 코끝에 향긋한 냄새가 스쳤다.

이 냄새는 울 아버지가 논 일하실 때 고단한 몸 잠시 쉬시며 피우던 담배 냄새 같았고 가을밭에서 콩을 거두고 계시는 엄마의 젖가슴에서 스며 나는 땀 내음같았다. 아마도 저 너머 밭에서 고추를 수확하는 오빠들의 숨결 인지도 모르겠다.

이 알 수 없는 향긋함은 내가 살던 뒷동산을 넘어 장독대 옆에 줄지어 자란 감나무, 살구나무, 포도나무, 밤나무를 위를 지나 출렁이는 벼를 가르며 나에게 찾아온 것이다.

너는 농부의 땀 내음과 흙과 나무 그리고 꽃으로 함축된 향기 그 자체였다. 너의 향기는 나의 고향이요. 엄마의 내음 이리라!

나는 이때쯤부터 나의 손님을 무조건 좋아하게 되었고 그는 나에게 늘 좋은 향기를 선물로 갖고 다.


요즈음도 나의 손님은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밤에도 새벽에도 아침에도 그리고 가끔씩은 대낮에도 말이다. 조용히 신호 없이 찾아오기도 하고 어떤 때는 요란함을 동반하며 나의 대문을 두드리기도 한다. 나는 그와 정원을 걷기도 하고 때론 차 한 잔을 마시기도 한다.

오늘도 나의 손님은 예고 없이 나의 정원에 찾아와 바나나 잎사귀를 부드럽게 어루만져 준다. 나는 그에게 최대한 예의를 갖추고 심히 말을 걸었다.

“어서 오세요. 나의 손님~”

님 너머로 아침 햇살이 나를 향해 환하게 미소를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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