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구한 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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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도 비슷한 느낌의 글을 쓴 적이 있었다.
그런데 좀 더 확신이 생겨버렸다.
이번 주 설악산 봉정암에 다녀왔다.
이번에 봉정암을 가는 길에서 참 많은 생물을 봤지만 단연 눈에 자꾸 밟히는 것은 식물과 바위였다.
좀 더 넓히자면 흙, 물, 식물, 바위, 바람 이게 전부인 곳 같았다.
단순한 것만 가득가득 채워져 있었고 그것들의 원래 모습, 점점 작아지는 모습, 깨어진 모습이 즐비했다.
나무들도 푸릇한 것부터 이전 장마 때문에 떠밀려온 뒤집힌 큰 통나무들도 심심찮게 보였다. 그 통나무가 전부 미라처럼 말라있었지만 음산하지 않았다. 그런 묵직한 나무들의 숙명을 아무렇지 않게 보고 그 어색한 자리를 덮어주고 시선을 돌려주는 다양한 풀, 꽃들도 몸집은 작아도 그곳의 터신 마냥 당당했다. 특히나 꽃의 모양은 단아하고 청아했다. 다양하진 않았지만 여름에 맞게 흰 꽃이 많았는데 푸른 잎 사이로 훨씬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많은 동물들이 숨어있겠지만 등산객의 손을 탄 다람쥐가 눈앞에 자주 보여서 반가웠다.
동산에서 만나는 다람쥐랑 이렇게 바위가 많은 큰 산에서 만난 다람쥐는 느낌이 달랐다. 그 모습은 마치 큰 덩치의 레슬링 선수가 몰래 키우는 작은 병아리를 훔쳐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귀여웠다.
순례를 하던 터라 무리를 지어 같이 출발했지만 곧 일행을 먼저 보내고 거의 3시간 가까이를 혼자 걷는 시간을 가졌다.
공간의 힘, 터의 힘이 그런 것일까? 설악산이 워낙 좋은 산이라 칭찬조차 무색하지만 어느 곳도 음산한 구석이 없었다. 바위 사이사이에 너무나 싱싱하게 솟아올라있는 고사리들을 보면서 집에 있는 고사리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모든 곳에서 배우게 되고 모든 곳이 좋았고 맑았고 양기가 가득한 곳이라는 걸 실감했다. 외롭지 않았고 쓸쓸하지도 않았다.
다만 나는 수많은 여행이란 선택지 앞에서 이런 거친 산을 타는 것을 선택하고 수많은 순례 중에 난이도 최상인 곳을 골라 가려는지 이 선택에 참 많은 궁금증이 일었다.
그러면서 더 확장돼 거친 삶, 기구한 팔자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그리고 이번에 같이 순례를 떠나게 된 도반들을 보면서 떠올려보게 됐다.
거친 팔자를 가진 사람이 분명히 있다.
하는 것마다 막히고 뭘 해도 부딪히고 불편한 사람들.
가족들은 물론이거니와 주변 사람의 인덕도 약한 사람.
불자가 아니라도 들어본 말, '업이 많은 사람'이라서 그런 건지 가는 길마다 척박한 사람들 말이다.
정말 그럴 수도 있다. 정말 나쁜 업이 많아서 그런 경우가 있다. 그럴 때는 참회를 하며 자신을 닦아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런데 어느 정도 다 가졌고 분명히 충분해도 스스로를 던지고 더 나은 무언가로 향하는 사람들이 있다. 누군가로부터 인정을 받고자 하는 거라면 그 칭찬 한번 받았으면 끝이어야 하지만 그게 안 되는 사람들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느끼는 점은 악행을 해서 기구한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착한 사람들, 분명히 가까이에서 보면 착한 것 같은데 한다고 해도 뭔가 잘 안 되는 사람들은 자기부터 주변을 맑히고 밝혀야 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박복한 팔자, 사나운 팔자, 거친 삶, 기구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에고가 생각한 판단일지 모른다.
오히려 자기가 원래 있어야 할 곳과 쓰임을 못 찾은 게 아닐까 라는 확신을 더 많이 가지게 됐다.
내 엄마, 내 아빠 품에서만 클 사람이 아닌 것이다.
세상에서 키워내야 할 사람, 이런 사람은 영혼이 참 크고 맑고 밝다.
그만큼 거칠게 자랄 수밖에 없는 영적인 순례자이다.
내 눈에 '축복받았다고 보이는 삶'보다 '번번이 막힌 부분을 계속 뚫어보려 애써야 하고 단련하는 모든 과정이 있는 삶'이 난이도가 높을 것이다. 난이도 높은 삶을 배울 때 정말 영적으로 작아서 배워야 할 사람도 있겠지만 이미 수많은 선택지 중에서 가장 어려운 팔자를 집어 들고 잘 살아내겠다고 마음먹고 나온 사람인 것이다. 듣기 좋으라는 발린 말이 아니라 정말로 거친 삶일수록 내가 해결해 나갈 수 있는 영적 힘이 더 큰 사람들이 많다는 걸 경험으로 참 많이 느끼고 알게 된다.
길이 막히거나 넘어질 때 정말로 내 영혼을 믿어야 한다.
내 영혼을 키우는 세상이 나를 믿고 있고 늘 같은 자리에서 응원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저 그곳에서 전해지는 따뜻한 눈길을 믿고 내가 가야 할 길을 찾아내는 것이다.
돌이야 원래 그 자리에 있다고 하지만 수많은 풀씨와 나무들이 봄 철 하늘을 다 누렇게 만들 만큼 씨앗을 퍼뜨린다. 큰 나무들 사이에서는 작은 나무들이 자라기 쉽지 않듯 멀리멀리 퍼뜨리려 애쓴다. 드센 바람이 옮기고 거친 물살이 옮겨온 씨앗이 온전하기만 하다면 세상은 다른 지역에서 온 그 씨앗을 멋진 설악산에서 키울지도 모르는 일이다.
내가 왜 이렇게 날리나? 나는 왜 이렇게 구르나? 원망하는 마음, 쓸쓸하고 자책하고 자신을 탓하는 마음이 아니라 오히려 더 괜찮은 곳으로 옮겨가고 있음을 마음 깊이 믿어보자.
그 믿음마저 두렵다면 그 마음을 놓아보자.
원래 아무것도 없던 그곳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