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 헤르만 헤세
아들의 책상 위에 놓인 데미안을 보고 한 참을 바라봤습니다.
지금은 소설의 교과서와 같은 책이 되었지만 여전히 이 소설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 책을 두 번, 그리고 아들 덕에 한 번 더 읽었지만 읽을 때마다 새로운 의문이 들었습니다.
헤세는 자신만의 문장으로 사람들에게 질문을 만드는 능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들에겐 어떤 질문이 생겼을지 궁금하지 않았습니다.
성장 소설이라고도 불리지만 뭔가 19금스럽고 불편한 이야기를
이제 막 성인이 된 아들이 어떤 감정으로 읽었을지가 속 좁은 아빠의 의문입니다.
누구는 이 소설을 이해하기 위해서 심리학이나 정신 분석학으로 해설을 첨부하기도 하지만
나의 어린 시절도, 아들의 지금 상황도 그럴 만큼의 철학적, 학문적 깊이는 없습니다.
문장은 있는 그대로 들어오지 않고 책의 마지막까지 혼돈의 연속입니다.
다만 읽다 보면 소름 도는 표현과 문장은 따로 떼어 놓고 기억해 두면 좋습니다.
나름 있는 척, 아는 척하기 좋은 문장들이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등장인물들의 대화 하나하나가 예술입니다.
리오넬 메시가 신들린 듯한 드리블로 유명하다면 헤르만 헤세는 신들린 듯한 문장의 장인이라 불릴 만합니다.
인상적인 문장만 나열해도 데미안의 독서록은 충분한 분량을 남길 수 있습니다.
읽은 지 한 참이 지났음에도 머릿속을 맴도는 문장이 남아 있습니다.
헤세 역시 노벨상 수상자로 전에 언급했던 카뮈와 함께 20세기를 대표하는 소설가입니다.
다만 카뮈의 소설은 읽으면 읽을수록 메시지가 하나로 이어진다면
헤세의 소설은 딱히 정답을 정해두기보다 해석의 여지를 열어둔 느낌이 다분합니다.
독일과 프랑스의 미묘한 차이일지도 모릅니다.
두 작가 모두 세계 대전의 참혹한 현실을 다른 입장에서 경험했습니다.
가해자의 편에서 고민한 소설과 피해자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분명히 다를 수 있으니까요.
해설집이나 유명 평론가의 글을 읽으면 이해되는 듯싶으면서도
왜 나는 그런 결론으로 다다르지 않는지 답답하기도 하고
내가 그렇게 읽었다는데 해설이 뭐 중요하나 싶기도 합니다.
아무튼 나는 데미안 당신을 잘 모르겠습니다. 아니 싱클레어인가요?
솔직히 내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당신을 알 수 있겠습니까?
아마도 이 소설이 나에게 어려운 이유는 둘 중에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굳이 정답을 찾아야 하는 이유가 귀찮은 성격 때문이거나
아직 나는 내 세계에서 조차 알을 깨고 나오지 못한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리라 생각합니다.
데미안이 성장 소설이라는 주장은 동의하지 않습니다.
청소년의 필독 도서라고 정해두기에는 이 소설의 대상은 너무 광범위합니다.
혹시나 여든까지 살아 있다면 그때 한 번 더 읽어보고 싶어 집니다.
헤세도 여든 넘게 살았으니까 그의 마지막 순간의 데미안은 어떤 모습이었을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다행히 아들도 뭔 이야기인지 잘 이해되지 않는 듯합니다.
이방인이 훨씬 재밌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빠는 그게 묘한 중독성이 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지금까지 세 번 읽은 소설이 처음이었다고 고백하면서 말입니다.
한 번 더 읽겠다는 의지는 혼자만의 비밀로 하겠습니다.
아니 내 안의 데미안과의 은밀한 약속이라 해 두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