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항. 해당 부모의 아기로 태어날지에 대한 최종 결정권은 갑에게 있다.
#. D-1 현생 아닌 저세상
갑:너 태아
을:나 삼신
1. 해당 부모의 아기로 태어날지에 대한 최종 결정권은 갑에게 있다.
2. 생후 100일 동안 아기 상태인 갑을 보호하기 위한 을의 분신(이하 수호천사)을 붙인다. 갑은 필요시 언제든 수호천사를 통해 을에게 협조를 요청할 수 있다. 다만 협조 승인 여부는 을의 의사에 따른다.
3. 을은 출산 1일 전 출산 전 부모의 삶을 확인할 수 있도록 열람권을 제공한다. 갑의 의사에 따라 열람권 사용 시 출산 후 부모를 교체할 수 없다.
4. 출산 후부터 생 마감 시까지의 갑의 현생 삶을 확인할 수 있는 열람권을 갑에게 부여한다.
5. 위 2번 조항 수호천사의 존재 및 3,4번 조항의 열람 기억은 생후 100일 시점 삼신의 최종 확인하에 모두 사라진다. 을은 기억 상실의 대가로 망각을 갑에게 제공한다. 다만 현생 마감 시점 모두 복구된다.(주마등)
6. 위 5번 조항 100일 시점 기억 사라지기 전 1회에 한해 부모의 생각을 수호천사를 통해 읽을 수 있다.
7. 갑은 을에게 100일 되기 전 소원을 1회 요구할 수 있으며, 승인 여부는 을의 의사에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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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18297. 갑과 을은 위 조항을 성실히 이행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출산 후 무효화할 수 없다.
서명 갑 _______________
을 ______삼신______
“쯧... 5번 조항 기억 상실을 없애버려야 하나....
지옥불에 떨어져 고통에 갈려나가 제발 현생으로 나가게 해달라고 그렇게 해서 건져줬더니, 요새는 왜리 스스로 삶을 끊어버리는 것들이 많은 건지.. 지옥불 때를 기억 못 하니 현생 힘들다고 지발로들 다시 지옥불로 기어들어오니 원.. 이 삼신 짓도 보람이 없네. 보람이 없어! 망할..”
귀 밑에 똑 떨어지는 은빛 똑 단발, 옅은 파랑의 찢어진 청자켓, 시원하게 복근과 어깨선을 드러낸 검정 탱크톱, 피부 위 알 수 없는 문자로 도배된 타투, 발끝까지 뒤덮은 잔뜩 찢어진 흰 청바지, 아무렇게나 신은 슬리퍼. 새하얀 얼굴을 한 삼신이 새하얀 공간 덩그러니 떠있는 스크린 속 현생 뉴스를 무심하게 끄며 말한다.
“여~삼신! 좀 어떠신가? 요새 우리 지옥헬이 아주 성수기던데. 현생 출산율이 계속 낮아져서 삼신 역할이 아예 없어지는 건 아닌가 몰라? 크크”
칠흑 같은 어둠으로 온몸을 뒤 감은 지옥불 염라가 새빨간 눈만 꿈뻑이며 어느샌가 삼신 옆에 나타나 얄밉게도 쫑알댄다.
“그 입을 지옥불에 넣어주고 싶네 염라? 고만해 안 그래도 돌겠으니까. 셀 수 없는 세월을 보냈는데 이렇게 힘든 때는 또 처음이네. 쟤가 이번에 나갈 애?”
삼신이 염라 옆 작은 솜뭉치를 가리키며 말한다.
“어~ 간신히 달래서 데려왔다고. 뭐 사연이 있는 영혼이긴 해서. 지금 길게 말하긴 좀 그렇고.. 어쨌든 다음 대상자야. 그럼 나 간다! 아! 그리고 잘 좀 해봐. 지옥불이 물론 끝도 없이 크긴 하지만, 현생에서 너무 많이 넘어오니까 정신이 없다고. 요새 삼신 일 못한다고 소문이 자자해 이거? 흐흐”
능글맞은 웃음으로 염라가 말한다.
“나가!!”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난 삼신이 말했다.
“후.. 정말..”
삼신이 말했다.
“후... 정말..?”
염라가 놓고 간 작은 솜뭉치가 어느새 삼신 옆에 다가와 삼신의 말을 따라 한다.
“자. 서로 바쁘니까 얼른얼른해보자고. 일단 이 계약서 먼저 보고. 동의하면 서명해. 물론 거절할 수 있긴 하지만 그럼 다시 지옥불로 돌아가야 하니까, 그것보단 현생이 낫... 흠흠”
삼신은 말을 잇지 못했다. 과연 지옥불보다 현생이 낫다고 할 수 있는 시대인가에 대한 확신을 언젠가부터 삼신도 할 수 없었던 게 사실이었다.
“아! 아니다 계약서 보기 전에 저 스크린 먼저 봐.
처음 나오는 건 네가 살아가게 될 현생의 현실이고, 그다음 나오는 건 네가 거기서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살게 될 네 인생. 2배속 돌리는 거 괜찮지? 요즘 아가들은 배속으로 돌리는 거 좋아하던데.. 어쩌다 기다림을 모르는 시대가 되었는지 원..”
삼신이 스크린을 펼치자 영상이 재생된다.
분단, 전쟁 위험, 대학입시경쟁, 군대, 취업문제, 결혼, 이혼, 저출산, 빈부격차, 대출금리 폭등, 파업, 난임, 육아, 질병, 사기, 범죄, 전염병, 희망퇴직, 코인 작살, 주식 박살, 부동산 폭등, 유류 인상, 물가상승, 월급 그대로… …
"음.. 삼신. 잠시 스탑! 하나만 물어보자. 음.. 저기가 지옥보다 나은 게 있어?"
솜뭉치가 손을 들어 화면 정지를 요청하고 말한다.
"흠흠.. 쿨럭.
나는 지옥보다 낫다고 믿네. 지옥은 노와 더 큰 노. 딱 이것뿐이지만 그래도 저곳은 희와 락도 있거든. 아, 애도 있고. 그리고 그래서 내가 망각이라는 선물도 같이 내려주잖나? 지옥은 망각이 없어. 그래서 어제의 고통부터 태고의 고통까지 모두 몸에 각인되지. 그리고 내일의 고통까지 예상 가능하고, 그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이 앞에 펼쳐지지. 나보다 거기서 방금 온 네가 더 잘 알지않나?"
갑작스러운 질문에 놀란 삼신은 당황했고, 그러다 보니 예전 할매라 불리던 시절 말투가 나와버렸다.
"참.. 나 그냥 현생 안 갈래."
저런 곳에 왜 굳이 가냐는 투로 솜뭉치가 말한다.
"아니. 기다려봐. 영상을 끝까지 보기나 하라고. 그 이후 결정해도 되잖아."
당황한 삼신이 급하게 솜뭉치 앞으로 스크린을 당겨 영상을 재생시킨다. 이번 영상은 솜뭉치가 현생에 태어나고 죽을 때까지 어떻게 살게 될지를 보여준다.
"와~! 저 지옥 같은 현생에서 나는 저렇게 살다 죽게 되는 거군요? 음. 좋다. 나 현생 갈래."
솜뭉치가 약간은 비아냥대며 말했다.
"그렇지? 거봐~끝까지 보라니까. 너는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앞으로 살게 될 현생의 삶이 나쁘진 않네."
눈치 못 챈 삼신이 자랑스럽다는 듯 갑자기 자랑스럽게 말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안가!!
지옥 같은 현생에서 지옥처럼 살다 다시 지옥불로 돌아올 거 뻔해 보이는데 뭐가 나쁘지 않다는 거야?
결정했어. 염라 다시 불러줘. 이 계약서는 찢는다?"
솜뭉치가 기가 막히다는 듯 삼신에게 말했다.
"어머엄머 야야!! 솜뭉치 기다려봐. 마지막 영상 하나 더 있어. 이거 보고 그때도 돌아가겠다면 더 안 잡는다. 내 참 치사스러워서. 뭐 저런 게 있어 진짜. 볼 거지? 튼다~?"
다급함과 짜증이 섞인 말투로 삼신이 말했다. 다시 영상이 재생된다.
마지막 영상은 솜뭉치가 태어날 현생의 부모가 그동안 살아온 삶을 보여주는 영상이었다.
이전 솜뭉치가 살게 될 영상과 달리, 그 부모의 앞날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당사자가 아니면 볼 수 없나 보다. 그들의 과거에서부터 지금 현재까지의 삶만 볼 수 있다는 차이가 있었고 그 영상에는 부모가 될 사람이 출생, 어린 시절, 학창 시절, 그리고 그들이 자라 운명처럼 서로를 알아보고 사랑을 시작하고, 달콤한 신혼이 지나, 어렵게 아이를 가져 불룩 나온 모의 배에 부가 태담을 하며 잠드는 화면으로 끝이 났다.
그리고 한동안 이어진 낯선 적막.
"마지막은 지금 이 시각 부모의 모습이야. 너를 만나기 위해 10달을 기다리고 있지. 음.. 준비된 영상은 여기까지고, 계약서 보면 알겠지만 방금 열람한 영상은 현생 후 100일 뒤에는 기억할 수 없게 돼.
물론 현생을 살면서 저 영상에서 본 삶과 약간은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엄청난 계기가 없는 한 크게 바뀌진 않을 거야.
음.. 말이 없어 왜?"
이전 영상을 봤을 때와는 달리 적막 속에 숨죽이고 있는 하얀 솜뭉치의 눈치를 보며 삼신이 물었다.
"흐음.. 저들이 내 부모 될 사람이란 거지.. 음.."
솜뭉치는 부모가 될 자들의 삶을 영상으로 보는동안 기분이 이상해짐을 느꼈다. 뭔가 중요한게 있는데 절대 기억나지 않게하겠다는 듯 생각하려 노력하면 할수록 점점 더 미궁으로 빠지는 기분이랄까.
그렇게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머릿속 생각을 애써 꾹꾹 눌르고 일단 계약서를 보기 시작했다. 무려 18,297개라는 셀 수 없이 많은 조항이었지만 솜뭉치여서 그런가 순식간에 봤고, 신기하게도 모든 조항이 머릿속에 담겼다. 원래 소설은 말이 안되는 법이다.
"좋아. 저 부모한테 보내줘. 여기 사인하면 되지? 어디 보자.. 갑.. 을.. 갑은 옘병.. 말만 갑이지 슈퍼 초초초 을이구만"
솜뭉치는 결정이 섰다는 듯 태연하게 말했다. 물론 계약서에 대한 불만도 한마디 덧붙였다.
"정말? 그래. 좋다니까! 그래도 지옥불보단 현생이지!"
삼신이 천만다행이라는 듯 말했다. 갑자기 마음을 바꾼 이유가 내심 궁금했지만 굳이 묻진 않았다.
‘흠.. 아까 염라가 사연이 있다고 하더니.. 음? 아니겠지..설마..’
이전 태도와 달리 부모의 삶 영상 하나에 갑작스레 현생을 결정한 솜뭉치가 의아한 삼신이 생각했다.
'뭐. 일단 내 알바 아니지. 빨리 현생으로 보내야겠다. 마음 변하기 전에!'
삼신은 솜뭉치의 생각이 바뀔까 봐 후딱 계약서 사인받고 보내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아직 예정일까지는 열흘이란 시간이 남았지만, 마음 바뀌기 전에 얼른 보내겠다는 생각이 들어 준비를 서둘렀다.
"그리고 계약서 내용대로 망각을 선물로 줄게. 저 윗대가리들은 주지 말라고들 하지만, 이 삼신이 특별히 생각해서 주는 거니까 감사하라고. 물론 지금의 너는 그게 얼마나 가치 있는지 모르겠지만. 언젠가 현생에서 망각에 감사할 때가 있을 거야.
그럼 이만 가! 현생 살면서 필요한 건 대부분 부모 통해 배우게 될 거고 급하게 전달할 거 있으면 니 머리에 당분간 열려있는 대천문 통해 전달할게. 혹시 너도 필요한 거 있으면 수호 분신 통해 콜 하고. 그런 잘 가! 브ㅏ이!”
그렇게 현재.
”응애~~~~~~~~~~~~~~~~~~~~~~”
망할 삼신.
그렇게 나는 여기 이렇게 누워있다.
어제도 봤고 내일도 볼 것 같은 하얀 천장만 보이는 일자 자세 꽁꽁 속싸개 속에 둘둘 말린 채로.
음.. 그렇게 난 축뽁이가 되었고 나에 대한 궁금한 내용은 앞으로 차근차근 술술 풀어볼 계획! 짜잔~!
장모님 집에 얹혀사는 아빠를 둔 0m+, 그래 0세 신생아의 육아 에세이! 크~느낌 있어~좋다!
궁금하면 구독과 좋아요 알림 설정까지!! 요새는 이런 거 해야 한다던데?
힙한 신생아의 삶을 보여줘야지. 잉잉.
그 시각 저 세상.
응애~~하는 솜뭉치의 모습을 모니터로 사뭇 진지하게 지켜보고 있는 삼신 앞에 염라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서.. 저 아이의 사연이란 게 뭔데?"
삼신이 세상 시크하게 염라에게 물었다.
"뭐.. 사연 없는 아이가 있겠나 요즘 시대에."
염라가 별거 아니란 듯이 답했다.
그리고 잠깐의 적막 후 염라가 한마디 덧붙였다.
"삼신 너도 얼마 전 소식 들었지? 천국에 있다 추방된."
"...?!"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삼신이었다.
"쟤가 걔야?"
삼신이 물었다.
"글쎄. 모를일이지."
염라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얼굴에 머금으며 말했다. 그리고 이 상황을 당연히 축뽁은 알리 없었다.
그저 철부지 초보 아빠의 세상 서툰 손길에 응애~~~~~~~~~~~~~~~~소리칠 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