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됐으려나... 그 영혼... 다시 볼 수 있을까?”
예랑이 창을 통해 여전히 눈발이 휘날리는 슬픔나무의 정원을 내려다보며 혼자 속삭였다.
꼭두새벽부터 예꼬를 병원에 데려가는 오픈런부터 이어진 긴 하루가 마침내 마무리되고 있다는 사실에 작은 안도감을 느끼면서도 왜인지 마음 한편이 쓸쓸했다. 그런 낯선 마음을 애써 지우려는 듯 예랑은 자신의 손에 든 따뜻한 찻잔을 천사 특유의 길고 아름다운 손가락을 활짝 펼쳐 감싸 안는다.
“What’s up이라...?”
예랑의 손가락 사이로 노란 찻잔에 새겨진 하얀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평범한 글자인데도 쓸쓸해진 마음 때문인지 이상하게 눈길이 한참 머문다.
“그러고 보니 이 컵을 놓고 갔던 그 영혼도... 심판대로 갔었지 아마? 그게 한 100년 전이었나? 그러고 보니 오늘 그 중년 여성의 영혼이 100년 만에 다른 인간의 슬픔을 선택한 영혼이었군. 참, 특이한 영혼이었어...”
예랑이 찻잔에 담긴 빛을 입가에 가져가 한 모금 들이켜며 고요히 생각에 잠긴다.
*
100년 전 익숙한 풍경 소리와 함께 한 영혼이 슬픔나무의 정원에 도착했다. 그 영혼은 슬픔 나무에서 자신의 슬픔이 아닌 타인의 슬픔을 선택했고 예랑은 슬픔 나무의 규칙에 따라 그 영혼의 인간 세상에서의 삶을 살펴봐야 했다.
워낙 타인의 슬픔을 선택했던 영혼들이 흔하지 않기도 했지만, 예랑이 그때 본 그 인간의 삶은 여타의 삶과 다른 독특한 면이 있었다. 당시만 해도 인간 세상에서 신이라는 존재가 절대자로 여겨지던 시대였는데, 그 영혼은 끊임없이 “신은 죽었다” 외치며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의문을 제기했다. 또 지금 현재를 즐기면서 살라는 내용과 함께 지금 이 삶이 끊임없이 똑같이 반복되고 있다는 내용을 설파했다.
물론 절대적인 존재로 신을 믿고 살아가던 당대의 인간들에게 그는 미친 사람 취급 당하며 무시당하기 일쑤였지만, 정말 ‘우연찮게도’ 당시 그의 생각은 시간이 흐를수록 다른 인간들에게 영향을 미치며 100년이 흐른 지금의 인간 세상에서 실제 그의 말대로 절대자였던 신의 존재는 부정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신의 분노를 샀던 걸까, 당시 그의 개인적인 삶은 고통과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 건강은 나날이 악화되어 시력을 거의 잃었고, 사랑했던 존재와 가장 가까웠던 가족에게 이용당하기만 하며 철저히 홀로 남는 고독 속에 죽어가야만 했다.
<신들의 대전쟁 때 소멸당한 수많은 신들은 죄의 대가로 인간계에서 숨어 살고 있다. 기억을 잃은 채, 혹은 기억이 있어도 할 수 있는 게 없는 채.>
이상하게도 예랑은 그 영혼의 삶을 살펴보는 동안 자신이 어릴 적 어디선가 들었던 이 말이 자꾸만 떠올랐다. 천국에 흔히 퍼져있는 흔한 소문이었겠지만, 정말 그 소문이 사실이라면 어쩌면 그 영혼이야말로, 그저 평범한 인간이 아닌, 그때 <절대신>에 의해 소멸당했다던 수많은 신들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독특했다. 물론 한낱 천사에 불과한 예랑이 그것이 진실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어쨌든 그는 인간들 중에 무척 특이한 인간이었다.
그 영혼은 슬픔 나무에서 타인의 슬픔을 선택한 보상으로 아까의 중년 여성과 같은 그 '기회'를 얻었다.
인간계로 돌아가 남은 여생동안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기회.
하지만 그는 역시나 특이하게 죽음을 선택했고, 그리고 그녀와 마찬가지로 심판대로 보내졌다. 심판대로 보내진 인간의 영혼이 어떤 결말을 맞이하는지는 예랑은 물론 알지 못했다. 자신의 임무는 슬픔 나무의 정원을 관리하는 것이었고, 그 이후의 일에 대해서는 관여할 수 없는 것이었으므로.
그저 언젠가 염라가 왔을 때, 인간의 영혼이었던 어떤 존재가 천국과 지옥, 그리고 인간 세상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공간에서 온통 고요뿐인 호수를 만들어 죽기 직전의 영혼들을 그 호수로 초대해 그 영혼의 삶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깨우침을 이룬 영혼에겐 남은 여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게 해 준다는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러면서 염라가 흐릿하게 그려진 그 호수를 보여주었는데, 그 호수의 한편에 <에포케>라는 글자가 적힌 푯말이 서있었고 심연처럼 고요한 호수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그 호수는 보면 볼수록 마치 이곳 슬픔 나무의 정원과 그 분위기가 묘하게 비슷해 보였다. 그런 공간, 그런 호수를 만들려면 신의 권능이 어느 정도는 필요할 것이었고, 그리고 공식적으로 그러한 비슷한 역할을 수행하는 이 슬픔 나무의 정원이 있는데, 신이 굳이 왜 그런 호수를 만드는 것을 허락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물론, 염라도 알지 못했다.
‘어쩌면... 슬픔 나무의 정원을 거쳐 <심판대>에 당도한 영혼은 천국도 지옥도 아닌, 다른 선택을 하는 것도 가능한 건가?’
예랑은 그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참 이상하게도 그 호수 그림을 보면 볼수록 신의 존재를 부정했던 삶을 살았던 그때 그 영혼이 떠올랐다. 염라에게 이런 궁금증에 대해 물어보기도 했지만,
“그 괴상한 세 신의 생각을 알 길이 있나, 허허. 삼신은 알려나? 내 만나면 한번 물어나 봐주지.” 하며 웃고 말 뿐이었다.
‘그러고 보면 천사와 악마의 역할은 분명한데, 인간의 역할은 뭘까?
불안과 혼란이 가득한 그 인간 세상에서 그 세상보다 더 불안하고 혼란하기만 한 존재들인 인간.
어느 때는 나 같은 천사보다 선하다가도, 누군가는 지옥 천불 속 악마들보다 악해지기도 하는 존재들.
과연, 세 신은 인간들을 왜 이 세상에 존재하게 만든 걸까?
절대신과 다른 신들이 있을 때는 인간이 없었던 건 확실시되고 있고, 신들의 대전쟁 이후 인간들이 존재하게 된 것이라 하는데... 신은 대체 인간을 왜 만든 거지? 모를 일이야. 하긴, 나도 내가 관리하는 이 작은 슬픔 나무의 정원도 제대로 모르는데, 뭐.’
예랑은 이 세상도, 슬픔 나무에 대해서도 생각보다 아는 게 없다는 생각이 들어 씁쓸해졌다.
아빠가, 그리고 엄마가 그렇게 소멸되지 않았다면, 그래서 더 체계적으로 이 슬픔 나무와 천국, 지옥, 그리고 인간 세상에 대해 배울 수 있었더라면 달랐을까 하는 의문이 떠올랐다. 아무런 답도 얻을 수 없는 허망한 의문.
예랑은 답에 닿을 수 없는 의문은 빨리 떨쳐내는 것만이 정답이라는 듯 자신의 손에 감싸여있는 <What’s up> 찻잔을 입가에서 떼고 창가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긴 손을 뻗어 작게 열려있던 창을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히 닫고는 누워있는 예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예랑이 손을 들어 조심히 예꼬의 이마를 짚어본다.
긴 하루 동안 자신과 붙어 인간계까지 다녀와 혹시나 무리가 가지 않았을까 하는 우려가 들었다. 여느 부모가 그러하듯이. 하지만 그의 우려와 달리 예꼬는 그저 새근새근 편안한 모습으로 잠들어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인기 의사를 기다린 보람이 있네. 약이 효과는 있는 것 같으니.”
예랑이 혼자 중얼거린다. 예랑은 예꼬의 이불을 조심히 끌어올려 덮어주고는 맞은편 자신의 침대에 눕는다.
‘길었던 하루였어. 오늘 밤엔 예꼬가 아프지 말고 잘 자야 할 텐데...’
예랑의 머리 위 떠있는 빛의 고리의 빛이 점점 줄어들며 잠에 빠져든다. 여느 부모가 그러하듯 온통 아기 걱정만 끌어안은 채.
<다음 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