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로 마음 속에 넘치는 것이 입밖으로 나오는 법이다.
"..이상입니다. 해당 국가 현지에서 우려되는 상황에 대한 세 가지 시나리오 영문 버전은 각 메일로 보내드렸으니 필요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임원회의에 참석한 아인이 발표를 마쳤다.
"주 아인 과장. 세 가지 중 가장 발생 가능한 시나리오는 어떤거죠?"
"말씀드린 것 중 가장 첫 번째 시나리오가 현 시점에서 가장 우려되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대처방안은 38번 슬라이드에 있는 방안이 가장 현실적이라 생각합니다. 추후 연쇄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사안에 대해선 112번 슬라이드에 정리해두었습니다."
하나를 물어보면 추가 사안에 대한 답까지 척척해내는 아인을 보며 함 전무는 내심 뿌듯했다.
"갑작스런 회장님 부재로 금일 회의는 제가 주재했으나 해당 내용은 회장님께도 보고 될 예정입니다. 조만간 회장님 콜 있을 수 있으니 항상 최신 상황으로 업데이트해두세요. 알았죠 주 과장?"
회사 내 최연소 임원 타이틀을 갖고 있는 함 전무는 신입시절 아인의 롤 모델이었다. 아인의 입사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이름 수 만큼이나 넘치게 많은 저 대리들 중 하나였던 당시 함 대리는 타 경쟁업체에 강제로 뺐길뻔한 큰 사업을 기적적으로 지켜냈고, 당시 회장 눈에 발탁되어 회장의 아들이 차지한 사장자리를 제외한 회사 내 권력 넘버 쓰리인 전무직에 당당히 승진한 사람이었으며, 아인과는 불과 3-4살 차이 밖에 나지 않았다. 아인이 생각하기에 현 회사에 얼마남지 않은 회사를 이끌어갈 핵심 인물을 꼽으라면 딱 둘, 서 부장과 함 전무. 그 중 하나였다.
"자 다음으로, 설 팀장님. 그 때 말한 현지 경쟁업체 분석 발표해주세요."
"아..네?..아..예....아니 전무님 다른게 아니고요.. 그게 거의 완성은 되었는데.. 조금 더 조사해야할 것이 있어서요..조금만 더 시간을 주시면.."
"흠.. 팀장님! 지금 회사 상황 어떤지 누구보다 잘 아시죠?"
오늘도 설 팀장의 차례가 되니 역시나 함 전무의 목소리는 하이톤을 그린다.
"그럼 지난 번 회의 때 특별히 따로 부탁드렸던 전년도 및 직전분기 현지 신생 업체 실적 수준은요?"
"아..네.. 전무님..그게 .. 그것도 현재 같이 준비중입니다..아시다시피 그쪽 사업은 2팀 담당인데 제가 도와주고 있는거고...요새 제가 저희 팀 업무에 해결해야할 것들도 많고..또 저희 3팀 직원도 부족하고 또.."
아인은 임원회의에서 말을 이어가고 있는 설 팀장을 보며 새삼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아인은 늘 설 팀장이 사무실 내 자기 자리, 높은 팀장 파티션에 웅크려 모니터 뒤에 숨어 과연 무슨 일을 하고 있는건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불과 얼마 전에는 설 팀장이 본인의 업무를 너무도 자연스럽게 아인에게 떠넘기자 참다 못한 아인이 이번엔 팀장님이 좀 해주십사 요청했고, 바로 그 때 지금 임원회의에서 말한 것과 똑같이 아인에게 본인은 2팀 사업 지원에 집중해야 해서 본인 업무를 할 수 없다는 논리를 폈기 때문이었다. 당시만 해도 2팀 사업에 아인은 관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내용을 정확히 알지 못해서 할수 없이 설 팀장의 말에 수긍해야만 했던 기억이 스쳐갔다. 그리고 당시 자리를 지키고있었던 오 차장의 답답하다는 한숨과 알 수 없는 곁눈질도 기억이 났다.
'아니..그런거였나.. 나랑 있을 때는 2팀 업무 해야한다고 본인 업무 미루고, 임원 회의에선 본인 업무하느라 2팀 업무를 도와주지 못하고 있다고..?’
비록 오 차장의 퇴사로 인해 강제로 원하지도 않은 임원회의에 참석하게 된 아인이었지만, 몇번 참석하지 않은 그 곳에서 설 팀장의 태도를 보며 참 여러가지 면에서 대단한 직장인이란 생각이 새삼 들었다.
20년 넘게 한 직장에서 살아남는다는건 대체 뭘까. 한가지 확실한 건 회사가 제공하는 연봉, 복지 등과 회사가 기대하는 직원의 업무능력, 열정, 책임 등과는 전혀 비례하지 않음을 다시 한번 현실적으로 목격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런 면에선 임원회의에 온 게 보람차긴하네.. 설 팀장은 정말 아무 일도 하지 않아왔음을.. 그 긴 세월동안 어떤 방식으로 본인이 일하지 않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왔는지를 여실히 알 수 있었으니까..
저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겠지.. 무능함과 뻔뻔함. 이러니 저런 설 팀장의 태도를 이미 알아챈 오 차장님이 퇴사각 재고 바로 런 했겠지.. 하- 정말 한 순간도 같은 공간에 있고 싶지 않다..'
아인이 다시 한번 설 팀장의 더러운 위대함(?)을 느끼는 동안 답답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이며 함 전무가 이야기를 이어갔다.
"설 팀장님. 전 회장님과 달리 두번 세번 똑같은 말 안하니 귀 열고 잘 들으세요. 제가 지난 번 회의 때 무려 부탁드린다는 표현까지 드리면서 당부했는데, 도대체 오늘 회의에 준비된 게 뭐죠? 회장님께서 왜 설 팀장님을 계속 그 자리에 앉혀두고 계신지 늘 고민하시고 또 생각하세요. 그리고 모든 결과에는 본인이 해온 행동과 언행이 있었음을 명심하시고요. 부디. 제발. 그 생각 좀 하시길 빕니다."
크게 한숨을 몰아쉰 함 전무는 말을 이어갔다.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서 부장님만 희망퇴직 관련해서 따로 의논드릴게 있으니 남아주시고, 모두 일어나셔도 됩니다. 고생하셨습니다."
회의장을 나와 사무실로 가는 엘리베이터 안 고요한 적막만이 설 팀장과 아인 사이에 흘렀다.
뻔뻔한 얼굴로 미꾸라지같이 처신하는 설 팀장을 다시 한번 목격한 아인은 분한 마음으로 가득차 독이 오를 때로 올라있었다.
"제 사표 회장님께 바로 전자결재 올려주세요. 내일 회장님 출근하시는대로 제가 직접 보고드리겠습니다."
결국 아인의 그 분노가 터져나와 고요한 엘리베이터의 적막을 깬 건 그때였다.
자고로 마음 속에 넘치는 것이 입밖으로 나오는 법이다.
"어휴..주 과장. 정말 이기적인 사람이네. 회사 상황 얼마나 안좋은지 임원회의 좀 참석했으면 느끼지 않나? 어떻게 그렇게 철없는 어린애 마냥 본인 생각만 이기적으로 하나?"
그래..회사는 늘 이런식이다.
회사의 일원으로써 업무 상 고충, 회사를 위한 개선점을 제시하면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만으로 어느새 해당 직원을 세상 이기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자책감을 갖게 한다.
오 차장이 나갈 때도, 김 대리가 나갈 때도.
회사는 늘 퇴사하는 사람이 왜 사표를 던지는지에 대한 고민보다, 퇴사자의 앞길을 응원하고 걱정해주기보다, 이렇게 너희 직원것들 하나라도 덜 짤라내려고 참고 버티는 힘든 회사를 등진 배신자로 낙인 찍어버린다.
'이러니 퇴사한 사람들이 죄다 이 회사를 그리 욕하고 다니지..맨날 건너듣기만 하다 막상 내가 겪으니 숨막히네 진짜.. 뻔한 전개 지겹다 지겨워'
"그래..말 잘 꺼냈네. 말 나온 김에 자네 사표 관련해서 할 말 있으니 가는 길에 커피나 잠깐 하지."
회사 한 켠에 마련된 자판기 앞 작은 테이블과 더 작은 의자에 나란히 앉은 설 팀장과 아인. 마치 중세시대 검투사가 승부를 보기 위해 서로 맞대고 눈싸움을 하는 것처럼 서로의 눈을 응시하고 있었다.
선공은 설 팀장.
그리고 그 선공을 받아든 아인의 얼굴은 당혹감에 창백해져갔다. 아인으로서는 상상도 못한 말이 설 팀장에게서 나왔기 때문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