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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NNECT WITH PARK Aug 30. 2024

씨앗의 힘

아무 데나 함부로 씨를 뿌리지 말라. 

5월 말경

3평 남짓한 텃밭에 잡초 뽑기, 고랑 만들기부터 시작해 

비료주기, 비닐 씌우기를 하고 토마토, 애호박, 가지, 애기수박, 상추를 심고서 

잡초 뽑고 물 주고 기둥 세워가며 어설프게 농사를 시작했다. 

고라니의 습격도 당하고, 긴 장마와 뜨거운 한 여름의 무더위도 버텨낸 소중한 작물들은 

8월이 되자 기다렸다는 듯 퐁퐁 여기저기에서 풍성한 선물들을 내어주기 시작했다. 

빨간 방울토마토, 길쭉길쭉하고 고상한 보랏빛을 띤 가지, 엄청난 번식력으로 마당의 반을 덮어버린 애호박, 하늘 높이 뻗어 올라가는 상추까지 하룻밤 사이에도 쑥쑥 자라나는 열매들을 보는 재미가 아주 쏠쏠했다. 

우후죽순으로 여기저기 자라기 시작한 애호박은 그 수가 너무 많아, 한 보따리를 따다가 뮤지컬 수업을 듣는 학생들과 나눠먹기도 했다.

애호박을 가져가신 분들이 내가 기른 농작물을 집에 가져가 맛있게 호박 볶음, 호박 무침, 호박전을 해 드시고는 인증샷까지 찍어 올려 주시며 감사하다고 해 주실 땐 얼마나 뿌듯하고 기분이 좋던지. 

이 맛에 농사짓는 건가 싶은 우쭐함 마저 들었다. 

한바탕 신나게, 재미나게 열매들을 따먹고서 요 며칠은 기승을 부리는 무더위를 핑계로 텃밭을 돌보지 못했다. 집을 비우고 서울로, 제주로 여행을 다녀오느라 연속으로 물을 주지 못한 날들도 이어지자 텃밭의 작물들은 눈에 띄게 생기를 잃어갔다. 

뜨거운 날씨는 식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동네 마을 회관에서는 "동네 주민 여러분~ 이 무더운 날씨에 밭일하다가 쓰러지시면 큰일 납니다. 더울 때는 물을 많이 드시고 집에서 쉬십시오~" 이런 방송이 매일 흘러나왔다. 

이웃집 농부 아저씨께 이제 한철 농사가 끝났으니 밭을 갈아엎고 배추나 무 같은 새로운 작물을 심어야 할 때라는 말을 듣고 나서는 더욱 텃밭 가꾸기에 게을러지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자라는 잡초들, 갈길을 잃고 이리저리 뻗어 나는 토마토 가지들, 노랗게 익어가는 애호박들이 눈에 밟히긴 했으나 애써 텃밭을 쳐다보지 않으려 했다. 


태풍의 영향인가.. 이제 가을이 시작되려는 건가? 

시원한 바람이 살랑살랑 불고 하늘에 하얀 구름도 손에 잡힐 가깝게 느껴진 오늘 아침.

 방바닥에 철퍼덕 누워 하늘을 보다가 무심코 창밖의 텃밭을 보는데

엇? 저게 뭐지? 

분홍색, 자주색, 못 보던 꽃이 피어있다.

코스모스다!  

아 맞다. 코스모스 씨를 심었었지.

몇 달 전 다이소에서 파는 1000원짜리 코스모스 씨를 사다가 빈 땅에 뿌리고 흙으로 대충 덮어주었던 것이 생각났다.  

근데 이건 뭐야? 

코스 모스 뒤편으로 눈을 돌려 보니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덩굴 식물이 담장을 가득 덮고 있다. 

나팔꽃이었다. 

'아 맞다. 그때 나는 코스모스 씨를 샀고, 지아는 나팔꽃 씨를 사서 같이 심었었지!'


씨앗을 심을 때만 해도 1000원짜리 씨앗이 과연 싹을 틔우기나 할까 싶어 빈 땅에 아무렇게나 뿌려 두었었는데 그 씨앗들이 시간을 먹고 물을 먹고 햇빛을 받으며 이렇게 자라고 꽃을 피워내고 있었던 것이다. 

자연의 신비로움에 놀라고 끈질긴 생명력과 번식력에 감탄하고, 색색이 화려한 꽃잎 색의 아름다움에 한참 취해 바라보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나팔꽃 덩굴이 확산해 나가는 기세가 보통이 아니었다. 

나팔꽃은 장미 넝쿨, 토마토, 호박, 가지, 수박, 잡초 할 것 없이 온 밭에 덩굴손을 뻗어 퍼져 나가며 텃밭을 덮어버리고 다른 작물들을 빙빙 둘러 감고 자라며 생장을 방해하고 있었다. 

앗! 이게 보통일이 아니었다. 

나팔꽃(Ipomoea indica)은 덩굴성이 강해 주변의 모든 것을 감고 올라가며 번식 속도도 빠릅니다. 기본 나팔꽃과 다르게 이름처럼 연푸른색 또는 청자색의 꽃을 피워내며, 잎이 나뉘지 않고 둥글게 피어나는 것이 특징입니다.   -나무 위키

오랜만에 장화를 신고 모자를 눌러쓰고 밭으로 나갔다. 

씨앗을 아무렇게나 무심하게 뿌려 놓은 대가로, 나팔꽃은 온 밭에서 사방으로 덩굴손을 올리며 퍼져나가고 있었다. 

폭염 주의보가 다시 내린 오늘 아침. 땀을 한 바가지 흘리면서 밭의 잡초들을 제거하고, 나팔꽃에 엉켜있는 작물들을 정리하며 다짐했다. 

"아무 데나 함부로 씨앗을 뿌리지 말자" 


어설픈 초보 농부는 이렇게 텃밭을 가꾸며 삶의 지혜를 하나 더 배운다. 

말로도, 행동으로도, 생각으로도 나쁜 씨앗을 심지 말자. 잘 아끼고 가꾸지 못할 씨앗이라면 뿌리지 말자. 

언젠가 그 인연은 어떤 식으로든 나에게 되돌아오니.  

함부로 잘못 심어 엉켜버리고 엉망이 된 텃밭을 보며,

지금부터는 신중하게 좋은 씨앗을 골라 심고, 정성 들여 잘 가꾸어 나가야겠다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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