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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식빵 Oct 15. 2021

술을 덜 마시게 된 이유

대학 다닐 때 내 별명 중 하나는 '주서운'이었다.

친구가 내 본명의 성 대신 '술 주(酒)' 자를 넣어 별명을 만들어 줄만큼 술을 잘 마시고 좋아했다.

안 그래도 허여건한 얼굴빛은 술을 아무리 마셔도 낯빛 하나 바뀌지 않았다. 돈은 없고 조금이라도 빨리 취하는 것이 목적인 대학생들이었으므로 그 당시엔 주로 소주를 마셨다. 회사를 다닐 때에도 회식 때나 친구를 만나면 주로 소주를 마셨다. 맥주의 찬란한 세계에 깊이 빠져들게 된 것은 결혼 후 영국에 살게 되면서부터이다. 지금과 다르게 한국에선 에일맥주나 IPA를 구하기 쉽지 않았던 때이다. 영국에서 나는 수만 가지 종류의 에일맥주를 펍과 마트에서 접하게 되었고, 신혼시절을 남편과 함께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다양한 맥주를 섭렵하는 데 쏟아부었다. 임신+수유 기간 2년간 술을 못 마셔 병이 날 뻔했다. 무알콜 맥주나 무알콜 와인을 한두 모금 마셔보기도 했으나 입맛만 버릴 뿐이었다. 퇴근 후 시원한 맥주를 야속하게 벌컥벌컥 혼자 마시는 남편이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심지어는 영국에서 아기 낳고 병원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일주일 만에 집에 돌아온 날, 몸이 아직 회복되지도 않았는데 축하 와인부터 한 잔 마셨다. (하룻밤 동안 수유 안 함)

아이가 돌이 되어 단유 하고 다시 내 삶에 술을 완전히 되찾고 난 후로는 거의 매일이다시피 맥주를 마셨다. 코스트코에 가면 맥주를 박스채 사다 놓고 저녁에 남편과 음료수 마시듯 한 캔 씩 해치웠다. 맥주는 그냥 탄산음료였다. 간혹 와인이나 사케, 막걸리, 소주도 마시고, 계절에 따라 샹그리아나 물드와인을 만들어 먹기도 했다.


쓰다 보니 내 인생에 얼마나 끊임없이 술을 마셔댔는지를 읊느라 너무 많은 문장을 써버렸다. 괜찮다. 너무 오랜만에 글을 쓰는데 (브런치 지난 글을 보니 무려 석 달 만이다!) 해방감이 든다. 왜 안 썼지 그동안. 쓸 말이 없기도 했고, 너무 잘 쓰는 누군가의 글들을 보고 의기소침해지기도 했고, 집안에 문제가 생겨 정신이 없기도 했고 아무튼 여러 일이 있었다.

아무튼 이렇게나 술을 주야장천 마시던 30대 후반의 내가 몇 달 전부터 술을 거의 안 마시게 되었다. 어쩌다가 한 캔 당기나 싶어 따면 두세 모금쯤 마시고 김이 다 빠질 때까지 다 먹지 못하고 놔두었다가 버리곤 했다. 그럴 거면 따질 말라고 남편한테 욕을 여러 번 먹었다. 그 세 모금을 먹고도 다음 날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쩌다 친구네가 놀러 오거나 해서 두 캔쯤 마시거나 거기다 소주를 한두 잔 섞어먹기라도 하면 다음날은 반시체가 되었다. 예전의 나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단순히 나이가 들어 그렇다고 하기에는 건강에 다른 문제가 전혀 없었고, 너무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당황스러웠다. 적당히 살짝 취해서 알딸딸하고 말도 잘 나오고, 심지어 영국에 살 때는 영어도 더 잘 나오고, 기분 좋아지는 그 기분을 느낄 수 없다니 뭔가 억울했다.


그러다 갑자기 몇 달 전에 10여 년 전 치료한 이 두어 개가 아파 치과를 찾았던 기억이 났다. 참고로 나는 조금이라도 이가 아파서 치과에 한 번 갔다가는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들이 여러 개라 백만 원, 이백만 원 단위로 깨진 경험이 잦은... 무시무시하게 내구성 안 좋고 잘 썩는다는 치아를 보유했다. 그간의 경험상 방치하면 치료비는 무시무시하게 더 커지므로 살짝만 참다가 달려갔는데, 이가 썩은 것은 아니지만 제대로 보려면 예전에 치료한 걸 뜯어봐야 하는데, 이미 신경치료까지 한 이들이라 만약 문제가 있다면 다음 수순은 임플란트뿐이라는 청천벽력...........

뭐 그래도 다행히 '잇몸 주변의 염증 때문에 아픈 것 같은데 약만 먹어보자'는 양심적인 치과의사를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스케일링도 받았다. 계산을 하고 나오려는데 간호사가 "술 드시면 안 돼요!"라 외쳤다. 나는 그 말에 놀라 "스케일링했을 때도 술 마시면 안 되는 건가요?!!" 하고 물으니

"염증이 있으시니 드시지 말라는 거예요." 하며 (내가 느끼기에) 약간 한심한 듯이 대꾸했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술맛이 뚝 떨어진 것이.

오늘 임신 후기인 친한 동생이 카톡을 하는데 그녀가 나처럼 이가 계속 아팠는데 참다가 참다가 조리원비 하려고 아껴둔 돈을 싸들고 치과에 다녀왔다는 우스갯소리를 했다. 조리원비를 포기할 만큼 무시무시한 치과 진료비..........

망할 복 없는 치아를 부디 내 딸이 닮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치열이...........ㅜ 이미 끝난 것 같다.

아무리 그래도 치실은 너무 귀찮다. 오늘도 겨우 했다. 치실이라곤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다는데 치과에 돈 써본 기억이 거의 없는 남편 이 모 씨는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부럽다. 치과에 떨면서 가지 않아도 되는 사실이.

놀랍다. 치과진료의 무서움이 술에 대한 내 사랑을 통제할 수도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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