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5학년 때 어머니를 따라 처음 교회에 갔습니다.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3박 4일 동안 금식기도를 하던 중에
처음으로 '성령 체험'이란 것을 했습니다.
몸이 덜덜 떨리더니 눈물샘이 터졌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독실했던 어머니는 세 자녀 중 한 명이 목회자가 되기를 바랐지만
그 희망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당신 자신이 신학대학에 진학해 목사 안수까지 받았습니다.
10여 년 간 어머니 교회를 다녔습니다.
지금은 예배에 참석하지 않습니다.
노쇠해진 어머니는 얼마 전 목회를 그만두었습니다.
여전히 나는 기독교인이라고 스스로 믿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에 명상을 접했습니다.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선배 한 분이 명상을 권했습니다.
그분을 따라 처음 명상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대부분 불교신자들이었고
명상을 지도하는 분도 불교에 몸을 담고 있는 분인 것 같았습니다.
대학 때 부전공으로 종교학을 공부하면서
여러 종교에 대해 개론 수준의 지식은 익혔기에 거부감은 없었습니다.
간단한 체조를 하고 반가부좌를 틀고 명상에 들어갔습니다.
눈을 감고 있는 동안 지도자께서 몸과 마음가짐에 대해 조언을 해주었습니다.
처음 명상을 시작하는 사람은 호흡수를 세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의외로 쉽지 않았습니다.
다른 생각이 계속 떠올랐습니다.
'어이쿠 이게 아니지, 몇까지 셌더라, 열둘인가? 아니 열셋이었던가?'
호흡수를 얼마나 정확하게 많이 셌는지 테스트하는 것도 아니니
헷갈린다 싶으면 다시 '하나'로 돌아갔습니다.
익숙지 않은 자세로 가만히 앉아있자니
다리가 저리고 허리도 아파왔습니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얼마나 남았을까'하는 생각을 하다 보니 호흡은 어느새 제멋대로.
그렇게 수없이 첫 번째 호흡만 세다가 나의 첫 명상은 끝이 났습니다.
명상에 관심을 갖고 이런저런 정보를 찾다 보니,
명상에도 트렌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특히 불교가 생소한 서양에서 그러한데,
동아시아의 대승 선불교가 처음 소개된 건
일본의 불교학자 스즈끼 다이세츠의 공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20세기 초부터 그의 저서와 강연을 통해 선(Zen) 사상이 미국에 알려졌고
올더스 헉슬리, 칼 융에 이어 잭 캐루악, 에리히 프롬 등이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는 Zen Boom으로 이어졌습니다.
혹자는 선(Zen) 사상이 서양에 알려진 사건을
핵에너지의 발견에 맞먹는 충격이라고 비유하기도 합니다.
60년 대 반전운동과 함께 미국을 휩쓸었던 히피 문화는
동아시아의 선불교 사상과는 결이 달랐습니다.
힌두교 명상에 경도된 측면이 강했습니다.
그다음으로는 티베트 명상과 한국의 선불교가 관심의 초점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위빠사나(마음 챙김 또는 알아차림 mindfulness) 명상이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미국 매사추세츠 의대 교수로 있던 존 카밧 진의 명상법이 유명합니다.
카밧 진은 한국의 숭산 스님으로부터 배운 수행법과 티베트 명상, 인도 요가 등을 접목해
자신의 명상법을 개발했습니다.
그는 명상이 스트레스와 고통 완화에 효과가 있다는 점에 착안해
1979년 ‘마음 챙김에 근거한 스트레스 완화 프로그램(MBSR)’클리닉을 설립했습니다.
지금은 MBSR을 변증적으로 계승해
명상과 인지치료를 접합시킨 '마음 챙김 명상을 기반으로 한 인지치료 요법 (MBCT)"이
우울증을 비롯한 신경증 치료에 이용되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 명상은 심리학과 뇌과학의 조명을 받고 있습니다.
동양의 직관적 추론이 서양의 경험적 사실로 증명될 것인지,
그 결과가 자못 흥미롭습니다.
기독교인이든, 무슬림이든 명상을 경험해 보는 것이 문제 될 것은 없어 보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삶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열려있기만 하다면 말입니다.
"저는 기독교인인데 명상 모임에 참여해도 될까요?"라는 질문에 이런 답을 얻은 적이 있습니다.
"칸트가 말했습니다. '반성 없는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없다.'
명상하는 삶은 순간순간 돌아보고 반성하는 삶입니다.
명상을 통해 몸과 마음이 투명해져서 지혜가 생긴다면 기독교인에게도 좋은 일이 아닐까요?"
P.S
명상 방식에 있어 위빠사나 수행과 사마타 수행의 차이를 강조하는 주장도 있습니다.
대체로 위빠사나 수행은 자각과 통찰을 중시하고 사마타 수행은 고요함 속에 머무르는 것을 강조합니다.
사마타와 위빠사나는 분리될 수 없고 한 손의 손등과 손바닥과 같은 관계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