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크는 사람이 결정한 선택의 그림자 입니다.
이기적 유전자 :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선택을 위해
인간은 과거부터 무리지어 사는 것이 유리했습니다. 부족생활을 하던 것이고, 그러기 위해 이기적 이타주의가 탄생합니다. 서로 협력하고 자기 자신이 약해질 때를 대비해서 약한 타인을 돌보는 것이죠.
이 모든 것이 과거에 살아남기 위한 전략적인 움직임이었다고 하면 여러분은 믿을 수 있나요? 그런데 살아남는 것만 생각한다면 누구도 만나지 않아도 되는 요즘 우리들은 사람들 만나기 위해 여러 모임을 찾아다닙니다. 뭐 이런 점을 보자면 살아남는 것 못지않게 외로움을 달래거나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타인과 함께 했다고 볼 수 있겠네요. 아니면 어쩌면 타인과 함께 하는 것이 유리한 환경에서 타인과 있는 것에 안정감을 느끼고, 즐거움을 느끼게 변화한 걸 수도 있죠.
가까운 미래에 ai에 의해서 1인 기업이 많아질 수 있겠지만, 어쨌든 지구상의 모든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가 완벽하게 끊어질 거라는 생각은 할 수 없겠네요.
인간관계를 맺고 사는 것은 과거와 달리 선택의 영역에 들어섰습니다. 결혼도, 임신도, 출산도, 섹스도, 전부 각각 사랑과 떨어져 독립적인 것으로 분리되었습니다. 심지어 연애도 사랑과는 멀어진 것 같습니다. 물론 모든 것을 사랑때문에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요.
외롭기 싫고, 재밌게 놀고 싶어서 연애를 하고
해야 할 것 같아서, 남들 다 해서, 남들이 하는 거 보니까 힘들어 보여서, 불행해 보여서 등등
요즘 세상을 관찰해보면, 사랑하니까 연애, 결혼, 섹스, 임신, 출산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전부 그때그때 따로 골라먹을 수 있는 세상이 더 좋고 편하니까. 사랑과 분리시켜 버린 것이죠. 이게 바로 이기적 유전자의 선택입니다.
결국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선택을 하기 위해서 추상적인 연결을 분리시켜버리는 기술까지 익혀버렸습니다. "사랑과 양육, 가정"으로의 연쇄적인 연결을 해체시키고, 이 연쇄적인 연결 속에 '성욕, 쾌락'만을 위해 자극만을 추구하는 동성애까지 우리 이기적 유전자는 추구하게 되버렸습니다.
저는 동성애를 그냥 자극을 추구하는 사람들이지 거기에 사랑을 붙이는 건 착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또한 선택과 리스크가 동반되겠죠.
인간 : 왜 그런 선택을 할까?
대부분의 인간은 자기 자신의 줏대, 소신을 지키지 못합니다.
A : 30cm 막대기
B : 10cm 막대기
어느 막대기가 더 길까요?
대부분이 B막대기라고 한다면, 처음에 A라고 했던 사람도 주춤주춤 의견을 수정하고 B라고 자신의 대답을 수정합니다. 타인, 대중, 다수의 의견에 휘둘리는 것이죠.
여러분 코로나19가 처음에 뭐라고 불렸나요? 기억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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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우한 폐렴으로 불렸습니다.
언어는 우리의 세계를 규정합니다. 우한 폐렴이라는 말을 캔슬당했죠. 저는 몇분 동안 뭐였는지 생각해야했습니다. 그전에 뭐라고 불렸는지 말이죠.
언어가 우리의 세계를 규정한다는 이유로 저는 브런치 글에 달 수 있는 키워드에 없는 단어가 있다는 게 조금 짜증납니다. 그냥 #로 해쉬태그 달고 싶네요 진짜. 위험은 없고 위기는 있어서 위기로 키워드 붙이는 겁니다. 이전에 쓴 글들도 이런 식으로 제한된 단어에서 선택한 경우가 많았네요. 이점은 참 아쉽습니다.
여러분 이게 핵심입니다. 정말로 진실로 말씀드리는데 어떤 선택을 하든 리스크는 따라 붙습니다.
그런데 타인의 욕망과, 타인의 의지와 다수의 대중에게 휩쓸려서 본인의 꿈과 목표가 흔들려서야 되겠습니까?
또 다니얼 카너먼의 "생각에 대한 생각"을 읽어보면 시스템1과 시스템2. 시스템1의 휴리스틱이 발동됩니다. 간편한 선택, 패턴에 의존하는 선택. 뇌의 휴리스틱에 휘둘리기도 하죠. 쎄함도 그 중 일부입니다. 틀릴 수도 맞을 수도 있다는 말이죠.
뭐 더닝크루거나, 멍청한 사람의 확신 등.. 선택에 대한 연구는 정말 많습니다.
리스크 관리 : 학습과 경험 : 하인리히 법칙에서 살아남기
위험에 대한 법칙 중에 바로 떠오르는 것만 두 가지인데, 머피의 법칙과 하인리히 법칙이 있네요. 머피의 법칙은 위험이라기보다 손해와 연속에 대한 법칙이라는 느낌이 들긴 합니다만, 하인리히 법칙은 위험을 다룬 법칙이죠.
하인리히 법칙은 이렇습니다. 나무위키의 내용을 참고하겠습니다.
하인리히 법칙(Heinrich's law) 또는 1:29:300의 법칙은 어떤 대형 사고가 발생하기 전에는 같은 원인으로 수십 차례의 경미한 사고와 수백 번의 징후가 반드시 나타남을 뜻하는 통계적 법칙이다. 유사한 법칙을 제창한 버드, 로프터스 및 애덤스의 법칙을 묶어 '사고의 삼각형(accident triangle)' 또는 '재해 연속성 이론'이라고도 한다.
이 법칙은 안전사고뿐만 아니라 전쟁에도 적용된다.
리스크 관리법 가장 처음에 학습과 경험, 생각과 성장하는 인간으로 정한 이유가 위와 같습니다.
징후가 스노우볼 효과로 커지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 징후만으로 위기를 상상해낼 수 있습니다. 이런 내용을 알고 있지 못한다면 그 징후를 내버려두고 그게 대형 사고가 될때까지 몸으로 경험하며 익혀야겠죠. 그런데 이런 내용을 알지 못한다면 그 대형사고의 인과나 상관 관계조차 인지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기에 대수롭지 않은 시점에서부터, 평화롭고, 변함없는 시절에서부터 미래를 내다보고 위기를 느끼고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학습에서부터 탄생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학습을 토대로, 여러 관점을 습득해두면! 하나의 경험을 할때마다 습득해둔 관점의 숫자만큼의 통찰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이건 정말로 큰 격차를 만들어냅니다.
인간이 세상을 이해하는 두 가지 방법 : 이야기, 비유
인간은 세상을 두 가지 방법으로 이해합니다. 그것은 바로 이야기와 비유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더욱 더 학습에 매진해야 합니다. 이런 경험을 해본적이 있을 겁니다. 난생 처음 보는 건데,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닮았다고 생각한 경험말이죠.
그러면 이미 알고 있는 것의 시작과 끝을 통해서 지금 보고 있는 것의 끝을 예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그걸 이용할 수도 있죠.
역사는 반복되지 않습니다. 그럴 수가 없죠. 말이 됩니까? 다만 역사는 이야기의 형식으로 하나의 사건이 시작과 끝을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배우고 다른 나라의 역사를 통해서 비슷한 이야기의 반복을 익히고, 지금 이 시대에서 비슷한 사건을 통해 비유로 결과를 예측합니다.
성공하거나 배우거나 = 반복하거나 새롭거나.
반복되는 결과가 예상됩니다. 배운 것으로 일을 진행해 봅니다. 알고 있는 것을 비유로 일을 진행해 성공한다면 성공으로 끝난 것이고, 실패한다면 반복되지 않은 새로운 케이스의 시작입니다. 이때는 또 다른 이야기를 비유로 가져오거나 배운 것을 토대로 길을 헤쳐나가야죠.
이런 이유로 끊임없이 배워야 합니다.
창조성, 창의력도 기존에 배운 것에서 나옵니다. 기존의 패턴, 기존의 이야기를 뒤틀어 클리쉐에서 벗어나는 것이 창조성이고, 창의력입니다.
창의적인 발상은 기존 질서의 파괴, 그것은 사고의 혁명입니다. 그것이 사고의 혁명이기 때문에 대부분은 창의적인 생각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혁명이란 기존의 질서에 이골이 난 사람들이 그것을 무너트리고 난 후에 어떤 시스템을 집어넣을지까지 결정해야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학습을 통한 관점이 상대성이다.
학습을 통해서 어떤 사건에 대해 예측할 수 있다거나 원인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 상대성의 획득입니다. 왜냐하면 공부하지 않았던 나와 공부한 나의 관점 차이는 확실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공부한다고 해도 불확실한 세계 속에서 확실한 원인을 파악할 수는 없겠지만 "실험적 사고"를 알고 있는 사람은 실험을 통해서 알아낼 겁니다. 물론! 그 실험 또한 통제할 수 없는 상황적인 영향을 포함해야겠지만 말이죠.